남은 인생서 가장 서늘한 여름
해마다 겪는 극한 폭염의 시대
기상·보건 국제기구 나란히
“이제 폭염 적응해 살아가야”
인간의 적응력은 탁월해서
온갖 폭염 대책 쏟아내지만
기후 대응 협업 뒷전에 미뤄둔
인간의 어리석음을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해마다 겪는 극한 폭염의 시대
기상·보건 국제기구 나란히
“이제 폭염 적응해 살아가야”
인간의 적응력은 탁월해서
온갖 폭염 대책 쏟아내지만
기후 대응 협업 뒷전에 미뤄둔
인간의 어리석음을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2023년 ‘가장 서늘한 여름을 보내며’란 칼럼을 쓴 것은 8월이었다. 역대급 폭염의 복판에서 기후를 주제로 삼았는데, 2년 만에 다시 폭염 얘기를 해보려는 지금 내 책상에는 7월 달력이 놓여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니, 이렇게 더워도 되는 건가’ 싶어 시작한 글이니 ‘아니, 이렇게…’ 하게 되는 더위가 2년 새 한 달쯤 빨라진 셈이다. 7월이 이러면 8월은 어떨지, 아직 7월 초순인 달력을 보고 있으면 두려워진다.
그 더웠던 2023년 여름을 ‘서늘하다’고 말한 이는 나사 기후학자였다. “우리는 남은 인생에서 가장 서늘한 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해마다 더 더워질 거라는 이 말은 그대로 돼가고 있다. 2년 전 지구촌 6·7·8월은 관측 사상 가장 더운 6·7·8월이었지만, 이듬해 6·8월이 더 더운 6·8월로 기록됐다. 우리나라도 가장 더운 6월이라던 작년 6월 평균 기온을 올해 6월이 가뿐히 넘어서더니, 며칠 전 서울에서 118년 관측 이래 7월 초순 최고 기온을 찍었다.
낮 기온이 37도를 넘어선 지난 7일 경북 구미의 외국인 노동자가 공사장 구석에 홀로 앉아서 숨을 거뒀다. ‘앉은 채 사망했다’는 뉴스 속 문장은 1995년 시카고 폭염 사태를 떠올리게 했다. 40도 폭염이 이어진 닷새간 739명이 숨졌는데, 그 사회적 부검을 진행한 이는 ‘폭염사회’란 책에 “상당수가 집에서 홀로 소파에 ‘앉은 채’ 죽어갔다”고 기록했다. ‘침묵의 살인자’ 폭염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낸 사건과 섬뜩하게 닮은 죽음의 묘사를 2025년 한국 신문에서 읽었다.
그제 서울의 돌발 폭우는 산불 번지는 야산이 아니라 일상의 퇴근길에 맞닥뜨린 기후변화였다. 이런 기상에 붙이던 ‘이변’은 이제 틀린 말이 됐다. 세계기상기구는 이달 초 기후변화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할 기후 현실”로 정의했고, 세계보건기구는 폭염을 “극단적 현상이 아닌 뉴노멀”로 규정했다. 우리 인식 속의 기후변화는 미래의 문제였는데, 그 미래가 어느새 현재의 삶에 닥쳐왔다. 시카고의 죽음을 일컫던 ‘기상이변의 희생자’란 표현을 구미 노동자에겐 쓰기 어려워졌다.
두 국제기구의 메시지는 같았다. “이제 인류가 폭염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2년 전 칼럼에서 기후 위기에 그래도 희망을 걸어볼 구석이라 꼽았던 셋, ①탄소제로 실현의 희미한 가능성 ②기후 대응 과학기술의 발전 가능성 ③인간의 탁월한 적응력 가운데 ③의 ‘적응’이 시급해졌다는 뜻이었다. 호주에선 50도 폭염을 견디려 땅을 6m 파내려가 지하에 집 짓고 사는 마을의 기사가 나왔던데, 최근 국내 폭염 뉴스도 다수는 적응에 관한 이야기였다.
폭염에 일을 쉬어야 하는 이들을 위한 기후보험, 폭염기 정신건강을 다룬 기후우울 세미나, 폭염이 갉아먹을 경제성장률 문제, 폭염에 우유 생산량이 줄어드는 젖소 대책, 러브버그처럼 기후변화와 밀접한 창궐 곤충 예상 목록…. 살수차 등 지자체마다 쏟아내는 폭염 대책부터 선수 생명이 위험하다며 경기 운영 개편을 촉구한 프로축구선수협회 기자회견에 이르기까지 다들 폭염 속에 살아갈 길을 열심히 찾고 있다.
이런 적응력을 희망적 요소로 들었던 건 그렇게 버티면서 시간을 버는 동안 ①과 ②의 영역에서 정치와 과학이 역할을 해주리란 기대와 맞물려 있었다. 외신까지 뒤져봐도 ②의 돌파구는 아직 보이지 않는데, ①은 오히려 후퇴해가는 뉴스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전쟁과 관세로 분주한 국제사회에서 기후 대응은 뒷전에 밀렸고, 와중에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정부와 일해온 기후변화 연구진을 죄다 해임하더니, 최근 스티븐 쿠닌 등 대표적 기후변화 부정론자들을 채용하고 있다고 한다.
기후변화를 논할 때 종종 인용되는 경제사학자 카를로 치폴라의 연구 주제는 인간의 어리석음(stupidity)이었다. ‘인간 어리석음의 기본법칙’을 제시하며 “남들은 물론 자신도 피해 입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 규정했는데, 기후변화 부정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인간의 비합리성에 주목했다. 저서 ‘상식 밖의 경제학’ 등에서 기후변화에 대응을 미루고 합리적 행동을 못하는 이유를 실험과 데이터로 보여줬다.
기후는 이렇게 인간의 어리석음을 파헤치는 중요한 단서가 됐고, 또 지금 인간의 적응력을 테스트하는 거대한 시험장이 됐다. 어리석음이 망치는 기후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 적응력을 발휘하는, 인간의 두 특징이 빚어낸 모순 속에 수은주는 계속 치솟고 있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