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와 선교지 교회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서로 존중하며 협력하는 관계가 가장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선교지 교회가 선교사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기도 하고 반대로 선교사가 선교지를 동역자가 아닌 수혜 대상으로만 여기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관계는 모두 선교지 교회의 자생력을 떨어뜨리고 만다.
역사 속에서 선교사에게 받기만 하는 선교를 거부하고 자립하려 했던 자발적 움직임을 찾을 수 있다. 교세가 약하더라도 자기 힘으로 부흥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사례들이다.
1971년 케냐의 대표적인 목회자였던 존 가투 동아프리카장로교회 총무는 “서구 선교사의 지도력과 재정 지원이 현지 교회 자립과 자치를 막고 있다”며 “아프리카 교회의 미래를 위해 선교사들이 5년간 철수하는 게 어떤가”라고 제안했다. 겉으로는 완곡했지만 사실상 ‘선교사는 떠나라’는 최후통첩과도 같았다. 이른바 ‘선교 유예(Mission Moratorium)’ 선언이었다. 이 일로 전 세계 선교계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떠난 사이 케냐 교회는 오히려 크게 성장했다. 케냐를 대표하는 동아프리카장로교회는 ‘자립’을 뜻하는 스와힐리어 ‘지테게메아’를 교단 슬로건으로 삼고 자생력을 키우는 데 힘썼다. 그 결과 교세는 5배 늘어 교인 수가 450만명을 넘어섰다. 사무엘 코비아 세계교회협의회 전 총무나 ‘아프리카 종교와 철학’의 저자 존 S 음비티 박사 같은 세계적인 교회 지도자와 신학자가 케냐에서 나왔다. 가투 목사의 파격적인 제안이 결국 부흥이라는 결실로 돌아온 셈이었다.
같은 해 필리핀 감리교회의 에메리토 낙필 감독도 “현대 선교 구조는 죽었다. 가장 선교적인 사역은 선교사가 돌아가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일을 계기로 필리핀그리스도연합교회(UCCP)는 자립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동반자 선교라는 정책 문서를 발표했다. 이후 7개년 발전 계획을 세워 전국 교회 예산의 22%를 모아 자립 기반을 다졌다.
자립 선교의 원조는 사실 우리나라였다. 앞선 두 나라보다 무려 46년이나 앞선 1925년 비슷한 선언을 했다. 1925년 존 모트 국제YMCA 사무총장이 내한했을 때 국내 교회 지도자와 선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한석진 목사는 동역자였던 사무엘 모펫 선교사에게 귀국을 권했다. 한 목사는 “교회의 기초가 서면 그 사업을 원주민에게 맡기고 선교사는 다른 곳으로 가서 새 일을 하는 게 좋다”며 “선교사들이 ‘내가 세운 학교나 교회’라는 우월감으로 영도권을 행사하는 것은 참된 복음 정신에 어긋나고 교회 발전에도 방해가 된다”고 일침했다. 이날 한 목사는 친구이자 동지였던 모펫 선교사를 향해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으로 가셔도 좋겠다”는 충격적인 말까지 던졌다. 날카로웠지만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진심을 담았다. 존 가투의 ‘선교 유예’는 선교 역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남았지만 그보다 수십년 앞서 한국에서 자립을 향한 몸부림이 있었던 것이었다.
건강한 선교란 선교지에 ‘한국적 교회’를 얼마나 많이 이식했느냐가 아니라 선교지의 신앙공동체를 얼마나 건강하게 세우고 모든 선교 인프라를 이양했는가에 달려 있다.
최근 보수교단 소속 선교 지도자들조차 “한국의 선교는 선교지 교회가 원하는 사역을 하는 방향으로 대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건강한 선교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변화다.
선교 140년 만에 선교사 파송 세계 2위라는 금자탑을 세운 한국교회지만 선교사와 지원자의 동반 고령화, 선교 후원 감소라는 복합 난제에 직면해 있다. 이럴 때일수록 바람직한 선교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선교 150주년을 넘어 200년을 향하는 한국교회가 더욱 관심 가져야 할 분야는 결국 선교지 교회와의 협력과 동역, 그들의 자립을 돕는 데 있다.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