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시간에 정물화를 숙제로 그려 낸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이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형태란 단순히 윤곽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빛과 그림자를 나누는 거라고. 다시 말해 사물을 다양한 시선으로 감각하라는 주문이었을까. 손끝으로 점자를 더듬듯 레몬 한 알의 질감과 색, 그리고 그 주변의 공간을 예민하게 감광해보아야 한다는.
그러다 보면 평면이 입체로 살아난다. 레몬 한 알이 말을 걸어오는 때가 있다. 데굴데굴 굴러온다.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독수리가 사냥감을 향해 수직으로 다이브하듯 망설임 없는 힘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의식해서는 안 된다. 숨소리조차 잊을 만큼 몰입해야 한다. 시를 쓰고 싶다면 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아기처럼, 아직 세계에 길들지 않은 용기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시는 정확한 사유의 결과라기보다 실패라는 필터를 통과한 뒤 남는 소금 몇 알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는 가장 미세한 떨림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실루엣만 어른거린다. 나는 그 윤곽을 정확히 그리려 애쓴다. 그럴수록 시는 멀어진다. 시를 쓸 때 ‘영감’이라는 말을 자의식 과잉쯤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단지 성실함만으로 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성실함이 재능’이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는 맞지만 때때로 자신을 그럴듯하게 속이는 문장일 수도 있다.
정수리에 폭포를 맞듯 정신의 결이 바뀌는 순간이 있다. 나는 오늘도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한 문장을 놓친 뒤에야 마음이 움직이는 걸 느낀다. 그러고 나면 이상하게도 소금 한 톨만 한 말 하나가 떠오른다. 나는 그 멀고도 희미한 것에 선을 그어본다. 쓰는 일은 어쩌면 나타날지도 모를 예감을 기다리는 일. 결국엔 자신의 감각을 신뢰하는 연습인지도 모르겠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