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정점을 지나 쇠퇴기로 접어들고 있다는, 이른바 ‘피크 코리아’ 우려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2019년 발간된 ‘피크 재팬: 위대한 야망의 종말’(브래드 글로서먼)이라는 책에 등장했던 이 표현은 이제 한국 경제를 겨누고 있다. 한국이 저성장, 소득 불평등 심화, 인구 감소, 글로벌 무역 환경 악화, 정치·사회 극단화 등 당면한 과제를 넘지 못하면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경고다.
박양수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이니셔티브(SGI) 원장은 8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국민들이 피크 코리아라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지금이 혁신의 적기”라고 말했다. 그는 “반도체, 인공지능(AI), 로봇 등 첨단산업 분야는 글로벌 시장에서 승자독식의 속성을 갖고 있다”며 “첨단산업 분야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원장은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은행에서 30년 넘게 재직하며 경제연구원장 등을 지낸 통화·거시 경제 전문가다. 2023년부터 대한상의 SGI 원장을 맡고 있다. 지난 3월 피크 코리아 극복을 위한 전략을 담은 저서 ‘리빌딩 코리아’를 출간했다.
-한국이 국가 발전단계상 정점에서 쇠퇴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서 있다고 진단했는데.
“1980년대 9%에 달했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이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쳐 지난해 2% 초반까지 떨어졌다. 소득 불평등도 심화하고 있다. 정치·사회 갈등마저 격화돼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여기에 글로벌 무역 환경도 좋지 않다.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 조선 등 한국의 주력 수출 분야만 보더라도 지난 20년 동안 한두 개를 제외하고는 그대로다. 역동성이 없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나머지 분야에선 여전히 글로벌 경쟁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는 환경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공정 방식을 바꾸거나 기후 관련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면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구조적으로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면서 노동을 통한 성장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념·진영간 극단적 갈등 속에서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는 동력을 살릴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도 있다. 이런 상황이 맞물려 피크 코리아라는 우려를 키우고 있다.”
-대안으로 ‘생산성 주도 성장’을 제시했는데.
“AI, 반도체, 로봇 등 첨단산업이나 기후 기술은 선점하는 기업이 승자독식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내생적 성장 전략이 통하는 산업이라고 한다. 보통은 생산성이 높아지다가 정체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들 산업의 경우 선점하면 계속해서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만큼 선점이 중요하다. 첨단산업과 기후 기술을 집중 육성해 이 분야에서 내생적 성장 메커니즘이 작동하도록 만들자는 게 생산성 주도 성장의 핵심이다. 그러려면 연구개발(R&D) 관행 개선, 교육 시스템 개편이 뒤따라야 한다. 한국은 제조업에 여전히 강점이 있다. 여기에 AI 기술을 접목한다면 강점을 극대화할 수 있다.”
-한국은 주변 국가들에 비해 산업 정책을 펴는 데 소극적인 것 같다.
“한국도 하고는 있지만 완전히 쏟아붓느냐, 그건 아니다. 일단 정부가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고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하면 ‘정부가 너무 개입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 반감이 인다. 또 첨단산업 영역에서 벤처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대기업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런데 한국에는 반기업 정서가 일부 있어 정부로서는 정치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첨단산업을 지원하고 싶어도 저출산·고령화 등 정부 재정이 필요한 곳도 많다. 재정 건전성을 걱정하는 쪽에서는 첨단산업에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입하는 게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첨단산업 인재 유출도 심각하다.
“한국에선 열심히 연구해 성과를 내도 성과급은 어느 수준 이상 안 올라가고 연공서열을 따라야 하는 문화가 있다.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높여 받을 수 있는데 애국심으로 잡아둘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도 잘 잡혀 있지 않다. 이런저런 행정 부담이 많다고 한다. 인재를 붙잡아둘 수 없다면 인재 풀을 확보해 끊임 없이 네트워크하며 공동연구해야 한다.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미국과 관세 협상이 진행 중인데.
“일단은 정부가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게 중요하다. 당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협상이지만 결국 공급망과 수출 다변화와 연결된 문제다. 미국도 고립주의, 중국도 고립주의로 계속 간다면 다른 나라들과 다자 협력 체계를 구축해 대응할지는 또 다른 이슈가 될 것이다. 관세 협상이 완료되면 업종별로 타격을 받는 분야가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이들에 대한 금융·세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이 크다. 고율 관세 기조가 트럼프 임기 중에만 유효할지, 미 정부 차원에서 계속 이어질지에 따라 생산기지 이전 등을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기본적으로 과거 다자주의, WTO 체제로의 복귀는 쉽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미·중 패권 경쟁은 계속되고 각자도생하는 시절이 상당부분 지속될 것이다.”
-연금·노동·재정·의료 개혁이 시급하지만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가 쉽지 않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노사정 합의를 통해 4대 부문 구조 개혁을 했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리더십도 있었지만 ‘그렇게 안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전 국민적인 위기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지금이 그렇다. 정치·경제적으로 위기의식이 있고 신산업 정책을 앞세워 돌파해보자는 공감대가 있다. 이를 실행하려면 결국 리더십이 중요하다. 설득하고 조정하고 막판에는 결단해서 합의를 이끌어내 실행해야 한다.”
권지혜 박상은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