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개정 상법이 던지는 숙제

입력 2025-07-10 00:32

지난주 상법 개정은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꿀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기업이 회사뿐 아니라 주주의 이익을 고려해 경영하도록 법적 틀이 바뀌었다. 앞으로는 재벌가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부당 합병이나 일감 몰아주기와 내부거래를 통한 이익 탈취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개정된 상법은 나아가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 확립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기업에 대한 건강한 투자를 유도하고 자본시장을 활성화해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부동산에 치우친 부를 생산적인 투자로 돌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개정 상법은 어쩌면 좀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우리 사회를 다르게 만들 수 있다. 새롭게 명시된 ‘기업 이사회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는 국가권력과 자본의 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는 동력이다. 한국에서 이 둘은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이어 왔다. 권력은 여러 어려운 국면에서 자본에 기여와 분배의 역할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국가가 온전히 감당하기 힘든 공공의 이익을 도모했다. 기업은 못마땅했지만 이를 이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이러한 ‘공생’은 에너지와 금융 등 독과점 분야, 또 대기업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졌다. 주주들의 투자를 받는 한전과 가스공사는 막대한 재정 적자에도 정부의 요구에 따라 요금을 동결해 왔다. 상장사인 금융지주 산하의 은행들도 상생금융이라는 명분 아래 이익의 상당 부분을 국가가 떠안아야 할 사회복지 수요에 투입했다.

개정 상법은 이러한 관계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전기요금 동결이 계속돼 한전의 이익이 줄어서 주가가 떨어지면 주주들은 화가 난다. 지금까지는 이를 표출할 수단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다르다. 개정된 상법을 근거로 한전 이사회에 주주를 위한 의사결정을 하지 않은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소송도 가능하다. 금융지주 주주들도 마찬가지다. 수조원의 상생금융 기금 탓에 자신에게 돌아올 배당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이사회를 상대로 법적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주주 자본주의가 공고해질수록, 영악한 주주가 많아질수록 기업이 과거처럼 정부에 ‘협조’할 수 있는 범위는 좁아지게 된다. 국가도 이전처럼 기업의 팔을 비틀고 옆구리를 찔러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데 점차 제약이 생길 것이다.

국가권력과 자본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다른 과제가 남게 된다. 비록 국가가 시장 논리에 어긋나는 방법을 택했지만 그간 기업과 은행의 기여가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한전의 요금 동결은 치솟는 물가를 붙잡는 데 분명히 역할을 했고, 은행의 상생기금도 한계 상황에 몰린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숨통을 틔워줬다. 최근 정부가 식품·유통업계와 간담회 뒤 발표한 가공식품 할인행사도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기업의 귀가 주주 쪽으로 더 열리게 되면 그간 억지로라도 담당했던 사회적 역할은 점차 축소될 것이다.

상법 개정 이후 고민은 이런 지점에서 시작돼야 한다.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주주 자본주의 사회에서 줄어들 수 있는 공공의 이익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 주주 자본주의의 부정적 효과를 경험한 해외에서는 오래전부터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균형 있게 고려하며 경영해야 한다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 개념이 제시됐다. 이때 이해관계자에는 주주뿐 아니라 직원과 고객, 협력업체, 지역사회, 정부, 환경이 두루 포함된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서 기업은 더 광범위한 사회적 책임을 지게 된다.

권기석 경제부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