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영남 지역을 휩쓴 대형 산불은 수많은 이들의 삶을 앗아갔다. 이후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다양한 경제적 지원과 구호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당장 생계와 거처를 잃은 이들에게 경제적 지원이 우선인 것은 당연하다. 의료 지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재난이 닥칠 때마다 늘 가장 마지막에 고려되거나 아예 빠지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마음의 회복’이다.
트라우마는 단순히 ‘충격적인 사건’의 결말이 아니다. 그 사건 이후 누가 어떻게 내 곁에 있어 주었는가, 그것이 트라우마의 병리적 발생을 결정한다. 트라우마 연구자들은 재난을 경험한 80% 이상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 회복된다고 말한다. 이는 가족이나 친지, 그리고 공동체의 지지기반이 안정적인 경우에 가능하다.
지난 3일부터 이틀간 필자는 상담전공 박사 13명과 함께 영남 산불 피해 지역의 목회자 부부들과 트라우마 회복을 위한 집단상담을 진행했다. 이 행사는 한국교회봉사단 요청으로 진행됐고, 피해 이후 처음 시도된 목회자 부부를 위한 전문가 심리 지원이었다.
“지원금이 너무 고맙긴 하지만….” 담담하게 피해 가족을 돌봐온 목회자들은 처음으로 숨겨놓은 무력감과 공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신앙으로 버틴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아직도 불길 속에 있었다. 한 목회자는 이렇게 토로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검은 물줄기가 산에서 내려와요. 그걸 보면 심장이 멎는 것 같습니다.” 교회 지붕 위에서 불을 끄던 한 목사는 자신의 사택이 눈앞에서 전소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심연의 고통은 재난지원금만으로는 치유되지 않는다.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
우리 사회의 연이은 사회적 참사 이후 생존자들이나 유가족들은 늘 2차 피해를 호소해 왔다.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 못해요.” “교회에 가면 믿음이 부족하다고 할까봐 말도 못 꺼냅니다.” “이제 그만 잊으라고 하는데, 누구에게도 제 진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다는 현실이 가장 큰 아픔입니다.” 가족, 이웃, 그리고 사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때 트라우마는 개인을 집어삼킨다. 그런 사회적 지지의 마지막 보루는 결국 국가다.
재난 이후 외상 후 장애를 넘어 외상 후 성장이 가능하려면 생존자에게는 배·보상과 의료지원뿐 아니라 제도적이고 안정적인 심리지원 체계가 이어져야 한다. 생존자들은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다행히 최근 몇 년간 정부는 국민 정신건강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해 왔다. 문재인정부는 ‘비의료 사회서비스’를 포함한 온국민 마음건강 종합대책을 발표했고, 윤석열정부도 전 국민 대상으로 심리상담을 제공하는 사업을 실시했다. 하지만 예산 편성 과정에 김건희 여사가 연관됐다는 정치적 프레임으로 삭감 대상이 된 현실은 매우 유감스럽다. 마음건강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생존의 문제다. 참여율이 낮다고 사업을 대폭 축소해선 안 된다. 오히려 정부의 적극적인 대국민 홍보가 필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경기지사 시절부터 전 국민 재난지원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 국가 재난지원의 완성은 국민 마음의 회복까지 나아가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심리상담의 제도화, 마음건강 서비스의 법제화는 국민 행복시대를 여는 중요한 열쇠다. 이제 정부와 보건복지부는 늘 후순위였던 마음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주길 바란다. 누구나 마음이 무너지면 삶도 무너지고 만다는 이치를 잊지 말자. 재난이 남긴 것은 단지 잿더미만이 아니다. 그 속에 남겨진 고통의 마음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진짜 복구와 회복을 말할 수 있다.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