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 거부한 지나친 자신감
진리·정의 위협해… 과학은
의심을 통해 오만 다스린다
진리·정의 위협해… 과학은
의심을 통해 오만 다스린다
정보는 넘쳐나고 배움의 문은 넓어졌다. 무엇이든 검색할 수 있고,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우리는 더 현명해졌을까. 더 자유로워졌을까.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정보 접근성은 엄청나게 높아졌지만, 그만큼 검증되지 않은 정보도 범람하고 있다. 정치적 진영논리가 강화되면서 전문가와 전문지식에 대한 불신이 유례없이 깊어졌다. 이런 환경은 음모론과 비합리적 믿음을 ‘대안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토양을 조성했다.
지난 4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이후에도 ‘부정선거 수사하라’는 깃발을 든 행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 것은 무지가 아니라 확신이었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행동한다는 믿음이 그들을 결속하고 움직였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도 그들의 확신을 흔들 수는 없었다.
확고한 신념과 믿음은 긍정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목표를 향한 집중력, 장애물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바람직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확신은 종종 시야를 가린다. 진실을 가로막는 벽이 되기도 한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그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이나 증거는 애써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게 된다.
이것이 심리학에서 ‘확증 편향’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확증 편향은 이미 믿고 있는 것을 뒷받침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증거는 무시하거나 반박하려는 경향을 강화시킨다. 이런 편향이 강한 확신과 만나면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상상하기 어렵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학력이 높을수록,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더 정교한 논리를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을 설득하기는 훨씬 어렵다. 그래서 확신은 단순히 무지의 결과가 아니며, 오히려 지성을 마비시키는 함정이 되기 쉽다. 다른 논거나 주장을 자신에 대한 공격처럼 느끼고, 합리적인 반론조차 그릇된 신념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불행히도 강한 신념이 만들어내는 추진력은 더 심한 오류를 향해 달려가는 가속장치가 되고 만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극단주의와 배타적 편견, 이념적 폐쇄성은 이러한 심리적 구조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위험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어떤 주장이나 믿음을 무작정 받아들이기보다는 일단 타당성을 검증해 보려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증거와 논리에 기반해 판단을 유보하거나 수정하려는 여지를 두는 것이다.
과학은 바로 이런 태도를 제도화한 지적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가설도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지 않고 반복적 검증과 반증의 대상으로 상정한다. 과학은 회의를 가르치며, 그것을 통해 인간의 오만을 다스린다. 이런 과학적 회의주의를 개인의 사고와 생활에도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때로는 자존심을 깎아내린다. 하지만 지적 성장과 인간적 성숙은 바로 그런 불안과 불편 위에서 자라날 수 있다.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이 조심스럽게 회의주의를 발동시켜야 하는 때다. 확신을 가지되 언제나 그것이 현실에 부합하는가를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신념이 아무리 근사하더라도, 아무리 힘 있는 사람이 주장하더라도,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동조하더라도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틀린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한계가 있으며 누구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오류에 대해서는 둔감하거나 무지하다. 확신은 객관적인 검증의 시험대에 오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집착이 아니라 성찰로 연결된다. 확신에 찬 강경론이 각광받는 시대에 합리적 회의론은 인기도, 재미도 없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진리와 정의를 위협하는 것은 회의주의가 아니라 비판을 거부하는 지나친 자신감이다.
허영란
울산대 교수
역사문화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