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학 목사의 우보천리] 영혼 없는 사회를 경계한다

입력 2025-07-09 03:04

요즘 ‘휴머노이드’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인간형 로봇이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오던 인간같이 대화하고 행동하는 그 로봇이다. 이것이 가시화되어 나오면서 곧 휴머노이드가 인간이 하는 일을 대체할 것이라는 경고들이 나오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필자는 휴머노이드를 필두로 한 인공지능(AI) 문명이 만들어 내는 미래는 단순히 인간의 노동 종말을 가져와 보통 사람이 건강하게 일할 자리를 빼앗아 간다든지 하는 경고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라 본다. 지금의 속도로 진행되는 AI 문명은 영혼이 없는 세계를 형성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영혼의 존재는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모든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생물들까지 포함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그 어떤 실체로 인정받아 왔다. 인간 안에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는 찾아낼 수 없지만 인간은 문명사를 시작한 이래 이 영혼의 존재를 전제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 전제가 지금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미 이런 영혼이 없는 세계를 바탕에 깔고 사상을 전개하는 인문학자들이 도처에서 나오고 있다. 나는 최근에 이 문명이 가는 흐름을 바르게 알고 싶어서 몇몇 젊은 목회자들과 유발 하라리가 쓴 책 ‘호모 데우스’를 읽고 있다.

하라리는 이 책에서 영혼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첨단과학 발견들을 인용해 가며 생물학적 알고리즘으로 들여다보면 인간 안에는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할 자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영혼은 인간의 뇌든, 심장이든, 저 배 끝이든, 그 어디에서도 존재를 찾아낼 수 없는 신화적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책을 갖고 토론을 하는데 한 젊은 목회자가 고백했다. “목사님, 신앙을 전제하지 않고 과학이 가져다준 이 객관적 자료만을 놓고 보면 하라리에게 설득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몸 안에 영혼이 있는 자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표현은 않지만 젊은 목회자들 상당수가 수긍하는 듯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질문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사회에는 점점 많아진다고 보세요?” 그들은 “예” 하고 대답했다. 나는 말했다. “그러면 정확히 반세기가 채 지나지 않아 이 문명에서 종교가 설 자리는 없어지겠군요.” 그렇지 않은가. 굳이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모든 고등종교는 영혼의 존재를 하나의 전제로 하여 진리가 선포된다. 인간 안에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영적인 존재를 깨달아 알게 해주는 그 어떤 존재의 본질이 있다는 전제에서 종교는 시작된다. 그것을 영혼이라 한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영혼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모두가 뇌 안의 생리 알고리즘의 반응일 뿐이라면, 종교가 설 자리가 앞으로 있겠는가. 영혼이 없다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랑도 기쁨도 행복도,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도,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아 살아가는 것도, 모두 생리적 알고리즘에서 나온 화학물질의 결합이다. 이미 인간 자체가 인공지능 없는 휴머노이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만들어 내는 세상에는 도덕이나 윤리도 의미가 없고, 선한 삶을 살며 누군가와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 모두 생리적 알고리즘일 뿐이다.

내가 젊은 목회자들에게 되물었다. “이렇게 영혼 없이 생리적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을 상상해 보면 어떠세요?” 다들 심각해졌다. 나는 결론 삼아 말했다. “이것이 지금 가고 있는 문명이 가진 거짓된 모습이에요. 여기에는 영혼이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이 소중히 여겨 왔던 가치들이 없습니다. 사랑도, 나눔도, 따뜻함도 없습니다.”

필자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이 무거워지기를 바란다.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더욱 무거워지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만들어 가는 이 문명의 방향에 대해 경각심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기독교가 설 수 있는 세계관과 인간관 자체가 근본에서부터 허물어져 가는 현실에 대해 침묵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예언자적 각성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새문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