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에서 사경을 헤매는 환자의 머리맡에 딸의 사진이 놓여 있다. 중환자실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다. 회복은 가족의 염원이자 환자 자신의 염원이다. 그런데 그의 책임이기도 하다. 환자가 사경을 헤쳐나와 가족 앞에 서기까지의 분투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다.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안데스산맥 고지대에 불시착한 동료가 며칠 밤낮 동안 눈 속을 헤매며 생사를 넘어 되돌아온 생환기를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작가 자신 또한 사막에 불시착해 갈증과 기아와 죽음을 마주한 경험을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죽음으로부터 생존해 돌아온 까닭이 자기 자신들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가족과 동료 때문이다. 걱정으로 인해 오히려 가족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생존에 가족의 생명이 달려 있다. 이렇게 생명이 서로 연결돼 있으니 살아 돌아가는 것이 자신들의 책임이다. 고산지대든 사막 한가운데든 인간은 홀로 있지 않다. 서로에 대한 걱정과 기대로 연결돼 있다. 중환자실 병상에 누워 있더라도 다르지 않다.
‘책임’이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생소하다. 책임이란 타인을 위한 일이어야 할 것 같은데 살기 위해 힘쓰는 것은 자신을 위한 행동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인간의 이타심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이 타인을 위해 산다는 것은 진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면에 또 다른 진실이 있다. 자신을 위하는 것조차 타인을 위해서라는 것.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 하지만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기심과 이타심을 구분하기 곤란해진다.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걱정한다. 그리고 거기에 책임을 느낀다. 인간은 놀라운 존재다.
중환자실에서 온갖 튜브를 몸에 달고 기계에 의지해 숨을 쉬는 환자는 고통스럽게 보인다.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죽음을 사는 것 같다. 몸에 연결된 관들이 떠날 사람을 붙잡고 있는 족쇄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누군가의 입에서 고통에서 해방시켜줘야 하지 않나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인간의 대지’의 주인공들처럼 환자는 걷고 있다. 죽음으로 기우는 몸을 힘겹게 세우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조금씩 움직인다.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포기했던 환자가 소생하면 의료진은 경외감을 느낀다. 치료가 그들을 살렸다고 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살아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죽음에서 살아나온 힘은 무엇일까. 사경을 헤맸던 환자는 어떤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을까.
머리맡 딸의 사진이 아빠를 살렸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딸을 위해 아빠가 살았다는 것도 맞다. 죽음이 닥친 순간 우리가 서로에 대한 염려로 연결됐다는 느낌, 내 몸이 나만의 소유가 아니라는 자각, 그리고 책임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그 순간에도 ‘행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생텍쥐페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행동하는 인간이어야 한다.
중환자실 병상에서 잠을 자는 듯이 보이는 환자. 가족들은 그가 살기 위한 꿈을 꾸고 있다고 믿는다. ‘인간의 대지’ 속 다음의 대사는 환자가 꿈속에서 하는 혼잣말일지도 모른다.
“눈 속에서는 모든 생존본능을 잃게 돼. 이틀, 사흘, 나흘 동안 걷다 보니 제발 잠 좀 잤으면 하는 바람뿐이더군. 나도 자고 싶었어. 하지만 이런 생각을 했지. 내가 살아 있다고 믿는다면, 아내는 내가 걷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 동료들도 내가 걷고 있으리라 믿을 거야. 그들 모두 날 믿고 있어. 만일 내가 걷지 않는다면, 난 나쁜 사람이 되는 거야.”
우리가 삶에 대한 애착이라고 부르던 많은 모습들이 사실 죽음 앞에서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김대현 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