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안 교수의 질문하는 삶] 계몽이란 무엇인가

입력 2025-07-08 03:03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겨울, ‘계몽’이란 단어가 갑작스럽게 소환된 일을 기억하는지요. 계엄령이 사실은 ‘계몽령’이란 황당한 주장이 회자되며 우리는 다시금 ‘계몽이란 무엇인가’란 질문 앞에 서게 됐습니다.

계몽에 관한 근대 철학 대부분은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에서 출발합니다. 1784년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칸트는 계몽을 “미성숙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으로 정의합니다. 성숙이란 이성을 스스로 사용해 생각하고 행동하며 삶에 대해 책임지는 인간의 모습을 뜻합니다. 칸트는 이런 성숙한 인간이 ‘공적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회’, 이를 가능케 하는 ‘정치 질서’가 바로 ‘계몽된 사회’의 증거라고 봤습니다.

칸트는 당시 시대가 계몽을 구호로 내세우긴 했지만 실제론 아직 계몽된 시대는 아니라고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어떨까요.

우리가 계몽이라 번역하는 영단어 ‘Enlightenment’와 독일어 표현 ‘Aufklärung’, 프랑스어 표현 ‘Les Lumières’는 모두 어둠을 밝히는 빛의 은유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빛의 이미지로 하나님의 계시와 진리, 지혜와 구원의 길을 드러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을 향한 기도에서 하나님이 보낸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이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길, ‘마음의 눈을 밝히사’ 하나님이 왜 그들을 불렀는지와 이들이 누릴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깨닫길 소망합니다.(엡 1:17~19) 여기서 ‘밝히다’는 말은 헬라어로 phōtizō, 곧 ‘빛을 비추다, 계몽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에게 계몽은 단지 지적인 앎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에 의해 마음이 열리고 진리를 깨닫는 삶의 전환이었습니다.

유럽의 계몽주의도 이런 성경적 빛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이후에 계몽주의는 점차 이성과 인간 중심적 사고로 나가기도 했지만 출발은 하나님이 준 이성과 양심을 따라 진리를 분별하고 공동체를 책임지는 삶에 대한 도전입니다. 칸트 철학은 이런 흐름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앞서 말했듯, 칸트는 계몽을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으로 봤습니다. 성숙한 인간은 ‘자기 판단’ ‘자기 행동’ ‘자기 책임’을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유익만을 좇지 않고 공동체의 유익, 곧 공동선을 함께 고민하고 추구합니다. 계몽의 궁극적 목적은 성숙한 인간이 모여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칸트는 계몽의 첫 번째 규칙으로 “스스로 생각하라”를 제시합니다. 주입된 생각이나 유행하는 주장에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말고 자기 이성으로 묻고 따져보며 판단하라는 뜻입니다. 자신뿐 아니라 타인과 공동체의 선을 위해 무엇이 옳고 정의로운지를 분별할 책임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두 번째 규칙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있다면, 저런 억울함과 고통을 당한다면, 나는 무엇을 바랄까. 자신을 이웃의 자리에 두고, 이웃이 당하는 고통을 자기 일처럼 느낄 수 있는 상상력과 공감의 윤리가 요구됩니다.

세 번째 규칙은 “자기 자신과 일관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억울함을 당할 때는 도움을 기대하면서, 정작 타인이 고통을 당할 때는 쉽게 외면하는 이중적 태도는 계몽된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눅 6:31) 이것이 신앙적 일관성이자 성숙한 윤리의 핵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계엄과 계몽은 말뜻뿐 아니라 하늘과 땅만큼 가치가 다른 세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계몽된 사람 성숙한 사람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편견과 이념, 당파적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 말씀 위에 서서 스스로 생각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자기 삶에 책임지는 태도를 실천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계몽된 신앙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평안과 성숙한 삶을 기원합니다.

강영안 한동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