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입장에서야 손대지 않는 게 좋았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자본시장 활성화를 내걸고 추진해 지난 3일 여야 합의로 개정된 상법 얘기다. 개정 상법은 기업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고, 사외이사를 감사위원으로 선임할 때 사내이사와 마찬가지로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합산 3%까지만 행사하도록 했다. 재계 안팎에선 주주들이 이사들을 상대로 고소고발 등 소송을 남발할 것이다, 소송을 의식한 이사들이 주주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안에 대해 신속한 결정을 하지 못해 투자가 위축될 것이다, 단기 차익을 노리는 경영권 공격 세력에 악용될 수 있다는 등의 우려가 쏟아졌다.
기업들의 걱정은 상법 개정이 끝이 아니라 시작일 거라는 점에서 더욱 크다. 이번 개정안에는 빠진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등이 처리되는 것도 시간 문제라고 보고 있다. “정권 초반이고 민주당 의석이 압도적이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죠. 최대한 읍소하는 수밖에.” 재계에는 이런 분위기가 넓게 퍼져 있다.
기업, 특히 오너들은 불편하겠지만 개정 상법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증시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큰 게 사실이다. 국내외 투자자들에게 한국 기업에 대한 신뢰를 심어줘 장기 투자를 유도하는 유인책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증시 및 소액주주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이를 보여준다. 자본시장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렇다고 재계 우려가 과장된 건 아니다. 경영 자율성이 위축되고, 예측 불가능한 법적 분쟁 가능성이 커지며, 투기 세력이 유입될 수 있다는 것 모두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기업 관계자들은 2003년 미국 헤지펀드 소버린이 SK 주식 14.99%를 5개 자회사를 통해 지분 쪼개기로 매입한 뒤 경영권 분쟁으로 주가가 오르자 2005년 9459억원의 시세차익을 거두고 철수했던 일을 떠올린다. 당시 SK는 경영권 방어에 약 1조원을 썼다. 반도체나 인공지능(AI) 등 신사업 분야에서 이사회의 과감한 판단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주장도 흘려들을 건 아니다. 3%룰 강화는 해외 투기 세력이 국내 기업 경영에 개입하거나 핵심 기술을 탈취하는 통로로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 또한 그렇다.
어떠한 법 개정이든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기업 활동의 근간이 되는 상법 개정 역시 주주 권익 보호, 기업 투명성 제고라는 큰 방향은 맞지만 기업 경영을 위축시킬 수 있는 상황이 예상된다면 대비책도 필요하다. 개정 상법이 기업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아닌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도록 정부, 국회, 재계가 적극 소통할 때다. 재계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요구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이사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의무를 다했을 경우 회사에 손해를 끼치더라도 면책해 주는 경영판단 원칙을 상법에 명문화하는 방안과 포이즌필, 차등의결권 등의 도입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두 제도 모두 미국 일본 유럽 일부 국가에선 시행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윤석열정부 시절 한덕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됐던 상법 개정안이 이재명 대통령 취임 이후 여야가 합의 처리한 1호 법안이 됐다. 이제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 소액주주 권익 향상이라는 개정 취지를 살리되 기업의 현실적인 고민을 들어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과정이 남아 있다. 국민의힘은 개정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을 지적했고 민주당도 보완 입법에 나서겠다고 밝혔으니 여야가 다시 한번 머리를 맞대길 바란다. 기업이 안정적으로 생존하고 성장해야 주주 권익도 지킬 수 있다.
권지혜 산업1부 차장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