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유주택자와 무주택자 그리고 일주택자

입력 2025-07-07 00:38

사는 곳이 계급을 상징하는
불편한 사회… 부동산대책이
없는 사람에게 제약되면 곤란

요즘 술자리에서 부동산 얘기가 빠지는 법이 없다. 누가 어디 아파트를 계약했는지, 신축 아파트 분양가는 얼마인지, ‘줍줍’(무순위 청약)은 언제 뜨는지, 대출은 가능한지 등등.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더 이상 집은 단순히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조차 조심스러워진 지금, 부동산은 삶의 조건이자 사회적 계급을 가르는 상징이 됐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이어진 ‘부동산 광풍기’ 이후 다시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아파트값은 가파르게 오르고, 특히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구)와 마용성(마포·용산·성동구) 등 서울 주요 지역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어느 지역에 사는지 혹은 어느 아파트를 구매할 수 있는지가 자산 수준과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는 척도다.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던 2019년 금융권을 출입하던 때가 떠오른다. 당시 만난 시중은행 임원들은 “30년 전 입행 초기 어느 지점으로 발령받았느냐에 따라 은행원들 인생이 갈렸다”고 했다. 강남지점에 배치받은 신입 행원은 근처 아파트를 샀고, 강북지점에 간 직원은 강북에 눌러앉았다. 지점을 옮기더라도 이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미 터를 잡았고 생활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아이 학교, 배우자 직장, 집값까지 얽히면서 이사 가는 선택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도에 사는 한 부행장 말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그때 그냥 서울 아파트 하나 샀어야 했는데….”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현실에서 이 자유는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원하는 지역에 집을 갖기 위해선 운과 소득, 타이밍과 정보까지 모두 필요하다. 거주는 권리가 아닌 자산이 됐고, 이 자산의 위치가 곧 사람의 위치를 결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동산 얘기는 종종 조용한 ‘선 긋기’로 이어진다. 특히 술자리에서 유주택자는 대체로 말을 아낀다. 오히려 무주택자가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 폭등한 집값에 관한 불평도 하지만 대체로 ‘부동산 공부’의 결과물에 가깝다. 시세 흐름, 청약제도, 대출 요건, 규제 지역 조건까지 꿰고 있는 무주택자도 많다. 무주택자들은 언젠가 올 기회를 위해 부동산을 공부하고, 계획을 세운다. ‘준전문가’가 되지 않고서는 접근조차 어려운 시장이 됐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무주택자’라는 단어에 어딘가 불편한 뉘앙스가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집이 없는 사람’이란 상태를 뜻하는 말일 뿐인데도, 괜히 위축되거나 설명을 덧붙이는 식이다. “못 사는 게 아니라 안 산 거야” 같은 말도 그런 맥락이다.

2025년 한국에서 자본주의 초창기 독일의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가 구분한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이 유주택자와 무주택자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난 듯하다. 그리고 이 사이에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바로 일주택자다. 실거주 목적의 1주택 보유자들은 집이 있지만 대출 이자를 갚아가며 더 나은 여건의 집으로 ‘갈아타기’를 꿈꾼다. 마르크스식으로 분류하자면 이들은 프티부르주아(소시민)쯤 될 수 있겠다.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때때로 다주택자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최근 이재명정부는 주택담보대출을 최대 6억원으로 제한하는 1호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다주택자 투기 억제라는 의도는 분명하지만, 무주택자와 일주택자에겐 또 하나의 제약처럼 작용할 수 있다. ‘내 집 마련’과 더 나은 지역으로의 이동을 꿈꾸는 이들을 위해선 장기적이고 정교한 정책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무주택자는 일주택자를 부러워하고, 일주택자는 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보낸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적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같은 사다리 위에 서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가장 가까운 이들끼리 갈등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경계를 지어왔다. 마르크스가 2025년 한국에 살고 있다면 이렇게 외치지 않았을까. 전국의 무주택자와 일주택자여, 단결하라.

김민영 산업2부 기자 m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