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향숙 (7) 기러기 가족으로 살던 아픔이 가정사역 원동력으로

입력 2025-07-08 03:11
김향숙 대표가 2004년 서울 서초구 양재시민의숲에서 찍은 가족사진. 왼쪽 윗줄부터 시계방향으로 첫째 예찬, 둘째 예준, 송길원 대표, 김 대표. 김 대표 제공

1998년 여름, 우리 가족은 미국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다. 남편의 안식년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1년 예정이었던 미국 생활이 8년으로 연장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1년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이들은 이미 미국 학교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였다. 휴일이라 학교가 쉬면 종일 슬퍼했다. 교육시스템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줬다. 남편과 오랜 대화 끝에 기러기 가족이 되기로 했다. 나는 남아서 아이들을 양육하고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방학마다 남편이 미국에 들어와 가족들과 합류했다.

8년간 오헤어 공항은 우리 가족의 만남과 이별의 추억으로 가득했다. 분리의 아픔을 덜어주려는 남편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올 때마다 늘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어느 날은 극심한 더위에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고 검은색 선글라스와 흰색 마스크로 얼굴 전체를 가린 채 나타났다. 모자와 마스크는 물론이고 팔 등 배 엉덩이 등 온몸에 사진이 붙어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었다. 선글라스를 벗고 나서야 남편인 줄 알았다. 우리는 박장대소했다.

함께 지내다가 떠날 시간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침울해졌다. 떠난 아빠를 그리워하며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잦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었지만 가족 단절이 생겨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처음 가정사역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먼저 우리 가정 안에서 사역을 제대로 하는 부모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다. 이 약속은 기러기 가족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거의 매일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도 일하셨다. 기러기 가족의 경험을 통해 시대적 아픔에 대한 해답을 주고 싶어 하셨다. 당시 한국에서는 해외 조기 유학 붐이 불면서 기러기 가족이 급증했다. 부작용도 많았다. 이혼이나 청소년 범죄, 자살률 증가, 중독 등 기러기 가족과 관련된 육체적·심리적 문제가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었다. 기러기 가족으로서 마음이 아팠다. 이 긍휼의 마음은 가정사역의 원동력이 되었다.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행동해야만 했다.

기러기 가족 서포터즈를 결성하고 기러기 부부관계회복캠프, 기러기 가족에게 주는 10가지 지혜와 기러기 가족의 8가지 유형 발표, 기러기 아빠와 일반인 대상 의식실태조사 등을 진행했다. 두 아들은 ‘우리 행복, 우리가 지킨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가정평화를 지키는 ‘와이 홈 키퍼스(Y-Home keepers)’운동을 펼쳤다. 한부모가족 힐링캠프 등 소외된 가족 사역으로도 발전했다. 홀로 사춘기 자녀를 양육하면서 겪었던 치열한 전쟁을 책 ‘행복샐러드’로 엮어 출간했고 박사학위 논문도 완성돼 이를 바탕으로 사춘기 부모교실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 미주 본부를 운영하며 기획 재정 사무 행정 홍보 진행까지 모두 혼자 했다. 혹독한 훈련이었다. 돌아보니 하나님의 경영수업이었다. 역경이 클수록 열매가 풍성했다.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낸 2006년 드디어 귀국했다. 가정사역자로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었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