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향숙 (6) 철저히 외로웠던 아버지의 마지막 숨 앞에 “사랑합니다”

입력 2025-07-07 03:04
김향숙 대표의 남편 송길원(오른쪽) 대표가 1994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김 대표 아버지(왼쪽),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 대표 제공

“누나, 아버지 산소호흡기 떼셨어.”

1997년 12월 이른 아침, 남동생에게서 긴급 연락이 왔다. 급히 비행기를 타고 부산 복음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 문을 열자 시체처럼 누워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샛노랗게 변한 눈동자는 멈춰 있었고 깡마른 몸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머리맡에 섰다. 지나온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청년 시절 예수님을 만났을 때 십자가 앞에 미워했던 아버지를 내려놓고 크게 울었다. 이제 아버지를 사랑하겠노라 고백했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 얼굴을 마주하면 화를 폭발하던 모습이 겹쳤다. 불안 원망 미움 분노가 교차했다. 마음은 다시 얼어붙었다.

아버지는 신학교를 은퇴하자마자 일흔의 나이에 러시아 선교사로 떠났다. 모스크바에 세워진 신학교 총장직을 수락한 것이다. 이후 1년간 힘차게 사역하다 대상포진에 걸린 뒤 잘못된 치료로 신장이 망가졌다. 귀국하자마자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를 의사들은 살려냈다. 일주일에 세 번씩 혈액투석을 하다가 결국은 더 이상 가망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당시 서울에 머물면서 부산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터라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아버지 병상을 지켰다. 가끔 의식이 돌아오면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울릉도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전도자의 아들로 태어나 늘 배고픔에 시달렸지만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었다 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무작정 집을 나와 낮에는 철도 지기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검정고시를 통과해 박사 목사 교수까지 되고 대학 부총장까지 지냈다. 유학 한번 가 본 일 없이 영어 일본어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아버지의 삶은 신기했다.

나는 천재적인 삶 너머에 철저히 홀로였던 아버지를 봤다. 발가락이 잘려나가고 신장이 다 망가져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조차 옆에 가족이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했다. 잔혹성이 아니라 연약함이 보였다. 아버지 됨과 남편 됨이 무엇인지 본 적도 배운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가만 보니 불쌍했다. 용서란 잊어주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바꾸는 것이었다.

바로 그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오래전에 해야 했을 말을 이제야 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세 번의 고백. 기적처럼 모든 감정의 찌꺼기가 사라졌다. 머리로 이해된 용서가 가슴으로 내려왔다. 하나님은 내게 용서의 마지막 기회를 주셨고 아버지는 마침내 용서를 선물하고 떠났다. 내 속에 있던 분노의 뇌관이 제거됐다.

아버지를 용서하는 여정에서 용서의 힘을 알게 됐다. 가정사역에 치유사역이 접목되기 시작했다. 치유되지 않은 부모나 부부의 상처는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된다. 용서를 통해 이 대물림을 끊어내야 했다. 나는 상처 입은 피해자에서 치유 받은 치유자로 다시 서게 되었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선교의 꿈은 나의 DNA에 각인되어 있었다. 2007년 12월 16일 우리 부부는 부산 호산나교회에서 가정선교사 1호로 파송되었다. 이후 가정사역 MBA를 통해 중국 캄보디아 대만 호주까지 가정선교사가 계속 세워지고 있다. 이제 하이패밀리는 전 세계 가정을 품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서게 됐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