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입력 2025-07-05 00:32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상대를 오해하는 일을 더 자주 하는 기분이다. 옹졸하고 치사하게도 나보다 부족해 보이는 이들에게 그렇다.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걸 때 응당 무언가를 바라는 거라는 착각을 하고 만다. 그 예상은 점점 틀릴 때가 많다.

집 근처 지하철역 입구에서 노숙인 자립을 위한 잡지를 파는 노숙인 출신 판매원에게 내가 저지른 만행이 가장 대표적이 아닐까 싶다. 다시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자전거로 퇴근하면서 종종 그 잡지를 산다. 그날 무슨 공돈이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름대로 인심을 쓰고 싶었던 거 같다. 잡지 한 권을 받아들고는 “이체가 좋으시죠”라면서 책값에 얼마를 더해 보냈다. 그러면서 맘씨 좋은 표정을 짓고는 “더운데 음료수 한잔 사드세요. 조금 더 넣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런 내가 조금 멋있게 느껴졌다. 자전거에 올라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판매원이 내게 다가왔다. 감사 인사를 하시려는 건가 싶었는데 웬걸. “7000원에서 1만2000원으로 값이 올랐는데, 잘 모르셨나 봐요.” 그는 오히려 내게 머쓱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격 인상이 된 지 한참 됐고, 그 후에도 산 적 있었는데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하려다 보니 조금 긴장했던 것 같다. 졸지에 잡지값을 깎은 아줌마가 됐다. 점잖게 설명해준 판매원에게 나는 정가에 조금의 음료수값을 더해 입금하며 사과까지 해야 했다.

주말 시내 나들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또 그랬다. 불쾌지수가 상당했던 날로 기억하는데, 집과 가까운 역에서 내려 계단으로 올라갈 때 무거운 손수레를 들고 내려오려는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다리가 불편하신지 그의 걸음은 상당히 흔들렸다. 남편이 빨리 올라가 그 짐을 승강구까지 내려줬다. 그러곤 돌아서서 우리에게 돌아오려는데, 할아버지가 수레에서 무언가를 꺼내 성큼성큼 계단을 다시 올라오는 게 아닌가. 조심스러운 보폭으로 내려가던 때와 달리 날렵했다. 자신을 도와준 남자가 혼자가 아님을 알아차린 할아버지는 오던 길을 다시 내려가 그 무언가를 더 꺼냈다. 아이 친구의 엄마가 말한 ‘비싸지만 유달리 맛있는’ 유산균 음료였다. 감사하다며 받았지만 그의 초라한 행색에 내 오해 회로는 여지없이 작동했다. ‘이렇게 더운 날 쉽게 상하는 걸 제대로 보관하신 걸까.’ 비싼 게 아니었다면 나는 그의 선의를 그냥 버렸을 것이다. 집에 와 찝찝한 마음을 이겨내고 하나씩 나눠 먹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국제 구호단체와 몇 해 전 동행한 아프리카 출장에서도 비슷한 ‘흑역사’를 남겼다. 시골 한적한 마을에서 취재를 마치고 도심으로 돌아오는 길에 흙벽돌로 지어진 집 앞에 앉은 한 여인이 우리가 탄 차를 향해 양손을 내미는 걸 봤다. 돈이나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한다고 생각하며 안쓰럽다는 식의 말을 뱉었다. 그러나 동행자의 설명은 완전 그 반대였다. “지나가는 사람을 축복해 주는 손짓이에요.”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안 따라준다. 사람을 외모나 옷차림, 그가 가진 사회적 지위나 재산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못할 때가 많음을 고백한다. 나보다 형편이 나은 상대를 만날 일이 있으면 전날부터 꿀리지 않으려고 고민했고, 그 반대 경우엔 별다른 대비 없이도 편안했다.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성경 여러 곳에서 나온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11) 등 구절은 하나님의 시선은 드러나는 조건이나 외적인 것이 아닌 마음에 있음을 강조한다.

나를 포함해 수많은 상대방에게 삐뚤어진 시선을 오랫동안 받아왔을 이들이 떠올랐다. 살면서 본의와 다르게 자신을 판단한 경험이 얼마나 많았을까. 대부분 다 지나친 인연이지만 사과해야겠다. “그동안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신은정 미션탐사부 차장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