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진 기자의 사모 몰랐수다] 조선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일본인 사모

입력 2025-07-05 03:07
영화 ‘무명’에서 사토 츠네코(왼쪽) 사모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자기에 싸서 남편인 노리마츠 마사야스 선교사에게 건네는 모습. 배우 김소이와 김륜호가 선교사 부부를 연기했다. CGN 제공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을 관람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두 일본인 무명 선교사의 이야기가 깊은 울림을 주며 상업영화들 사이에서도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조용히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무명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슬픔에 빠진 조선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고자 찾아온 일본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노리마츠 마사야스(1863~1921)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이며 종교 행위임을 역설한 오다 나라지(1908~1980)의 삶과 헌신을 조명했다.

격동의 시대에 두 일본인 선교사가 조선 땅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지만 더 큰 감동은 자신들을 향한 오해와 적대감, 미움의 한복판에서도 조선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증명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순종은 복음이 말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임을 보여주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며 유독 눈길을 끌었던 장면은 사토 츠네코 사모의 삶이었다. 노리마츠 선교사는 서울에서 사역하던 중 일본에 잠시 돌아갔다가 사토 사모와 결혼했다. 이듬해 서울에서 장남 요시노부를 낳았다. 이후 노방전도 중 만난 한 성도의 요청으로 부부는 사역지를 수원으로 옮겼고, 수원 최초의 교회인 수원동신교회를 세웠다.

사토 사모는 한복을 입고 초가집에 살며 조선인과 같은 삶을 살고자 했다. 네 자녀를 키우는 동안 일본어 대신 조선어만 가르쳤고 쌀과 약이 떨어지면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쌀과 보리를 구해 이웃에게 나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길 바랐던 삶. 조선을 깊이 사랑했던 사토 사모는 영양실조와 폐결핵으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좁은 길을 택한 사토 사모의 삶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곳 이방 땅에서 가난과 질병, 미움과 외면을 견디게 했을까. 나라면 과연 그 길을 순종하며 걸을 수 있었을까.’

그 물음의 끝에서 나는 깨달았다. 인간의 결단이나 의지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가능한 헌신이었음을. 사토 사모의 삶 너머에 있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노리마츠 선교사와 사토 사모가 일제에 상처 입은 조선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원수의 나라에서 온 이방인이었지만 그들의 진심 어린 섬김은 결국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의 일본은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 노리마츠의 일본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조선인의 고백은 복음이 어떻게 증오를 넘어 사랑을 낳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내가 떠난 뒤에도 홀로 복음을 전하던 노리마츠 선교사는 병든 몸을 이끌고 1914년 수원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그가 떠나던 날 많은 조선인이 눈물로 배웅했다. 그의 소천 소식에 성도들은 한달음에 달려가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그가 바란 대로 부부는 수원 동신교회 뒤뜰에 함께 묻혔다. 광복 후 대부분의 일본인 기념비가 훼손됐지만 이 비석만큼은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7월 한국교회는 뜨거운 여름의 열기만큼이나 선교와 섬김의 열정으로 가득하다. 단기 선교팀이 구성되고 농어촌 봉사 활동과 여름성경학교가 곳곳에서 준비되는 이 시기에 영화 무명을 통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 복음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된다.

두 무명의 선교사는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는 인생을 살았다. 이 여름 우리도 봉사의 현장에서 다시 복음 앞에 서야 할 때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오직 예수의 이름만 남기고 사라지는 그 무명의 길을 함께 걷기를 소망한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