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은 ‘메가 이벤트’로 불린다. 2주 남짓 진행되는 스포츠 행사지만 길게는 10여년의 준비 기간을 거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진행된 서울올림픽 역시 메가 이벤트의 전형적 사례다.
그동안 서울올림픽에 대한 해석은 다양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탈정치화론’ 또는 ‘우민화론’이다. 1980년 부당하게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스포츠(Sports), 영화(Screen), 성산업(Sex) 등을 묶은 ‘3S’ 정책을 통해 정치·사회적 모순을 은폐하고 대중의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켰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서울올림픽은 3S 정책의 정점에 있다.
저자인 사회학자 박해남은 서울올림픽을 색다른 각도에서 고찰한다. 바로 ‘공연’이라는 관점이다. 저자는 “서울올림픽의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일련의 단계를 연극의 준비 과정으로 재해석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공연의 핵심 인물은 연출자다. 연출자는 공연을 기획하고 무대를 만들고, 배우를 훈련시킨 뒤 무대를 완성한다. 저자는 61년과 80년, 두 번에 걸쳐 권력을 잡은 군인들을 연출자로 가정한다. 저자는 “군인들은 경제성장을 통해 도시에 풍요의 경관을 연출하고 규율과 감시를 통해 도시적 삶에 질서를 부여하겠다고 선언했다”면서 “한국인의 도시적 삶과 사회적 삶을 그럴듯한 공연으로 만들어줄 것을 약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80년대 군인은 같은 연출자지만 60년대 군인과 큰 차이가 있었다. 바로 공연을 바라보는 관객의 설정이 달랐다. 60년대 군인은 연출자인 동시에 관객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규율과 질서를 만들어나갔다. 하지만 80년대 신군부는 외국인의 눈을 중시했고 그들의 시선에 맞춰 공연을 준비했다. 통행금지 해제와 해외여행 허용 등 자유화 조치가 대표적이다. 세계인의 눈에 비춰 비정상의 것을 정상화하는 방식이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서울올림픽은 신군부가 외국인 관객의 기준에 맞는 새로운 감시와 규율 체제를 만들어낸 계기로 작용했다. 올림픽 개최 결정 이후 만들어진 ‘서울올림픽대회지원위원회’는 정부가 올림픽을 앞두고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에 ‘국민의식 수준 향상’, ‘선진 시민의식 확립’, ‘질서의식 정착’을 포함했다. 정부가 주도한 여러 캠페인을 통해 무대에 설 배우들의 ‘훈련’이 진행됐다. 저자는 “올림픽 무대의 배우가 될 것이라 기대되는 도시민들이 군인들의 대본에 따라 연기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해 사회 구성원의 습속(習俗)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것은 연출진의 피라미드 상층을 구성하는 이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무대도 정비됐다. 물론 기준은 외국인의 눈이었다. 연출자들은 올림픽을 위해 서울의 도심을 재개발했고, 무허가주택을 대대적으로 철거했다. 이 과정에서 72만명에 이르는 이주자가 발생했다. 외국인의 시선이 들어오는 한강 주변, 간선도로변, 지하철 지상구간 주변, 철로변이 정비됐고 보신탕·개소주·뱀탕집도 대로변에서 쫓겨나 외국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겨져야 했다.
무대에 설 수 없는 배우도 가려냈다. 87년 6월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던 연출자들은 올림픽을 명분으로 사회안정을 앞세우며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잠재우려는 조치는 유지했다. ‘서울올림픽 대비 범죄 단속기간’이 선포됐고, 단속 대상 리스트 맨 앞자리는 ‘시위, 농성 등 불법집단행동’과 ‘불순세력의 사회교란행위’가 차지했다. 올림픽이 다가오자 ‘평화구역’이 설정돼 집회와 시위도 전면 금지됐다. 평화구역은 서울시 대부분과 올림픽 경기장과 올림픽 관계자의 이동 경로인 서울 인근 지역, 충남 온양이나 도고 같은 온천 관광지도 포함됐다. 특히 올림픽 성화가 머무는 20개 도시와 성화가 지나가는 모든 도로도 평화구역으로 지정됐다. 88년 8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 국토 전역에서 모든 집회와 시위가 금지된 셈이다.
연출자들의 의도대로 서울올림픽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저자는 서울올림픽을 ‘마당놀이’라고 표현한다. 저자는 “군인들은 올림픽의 무대 서울이 자유로운 형식으로 상영되는 마당극의 무대가 되지 못하게 했고, 자유로운 듯하지만 극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상연되는 마당놀이만 허용했다”면서 “서울올림픽은 객석에 초대되지 않은 이들은 개입할 수 없고 객석에 앉은 이들 또한 좀처럼 영향을 미치기 쉽지 않은 마당놀이로 상연됐다”고 설명한다.
연극이 끝난 후 연출자들은 ‘올림픽의 무대 장치’를 그대로 복제하고 확산시킨 ‘신도시’라는 새로운 공연을 마련했다. ‘발전과 문명’의 서사가 ‘선진국 수준의 도시’를 표방한 신도시로 이전된 것이다. 이곳의 중산층 주민들은 또 다른 연출자가 되면서 자신만의 집안을 꾸미고, 신도시라는 무대에서 어울리지 않는 배우를 배제하기도 했다. 같은 단지 내 임대아파트 거주민의 통행을 차단하고 울타리를 설치하는가 하면, 임대아파트 자녀들이 자신과 같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압력을 넣기도 했다.
서울올림픽 이후 ‘순회공연’은 계속됐다. 1993년 대전엑스포와 2002년 월드컵이다. 특히 월드컵 때는 연인원 270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만 별다른 사고도 없었고, 쓰레기까지 깨끗하게 치우는 모습에 외신들이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의 기준이었던 ‘외국인의 시선’이 내면화한 것이다. 저자는 “세계라는 관객에게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무대적 무의식이 여전히 우리를 관통하고 있다”고 평했다.
저자는 서울올림픽이 남긴 유산을 ‘88년 체제’로 규정한다. 저자는 “88년 체제가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군인을 대신에 외국인 또는 세계와 맺은 ‘공연계약’에 기초한다”면서 “공연계약에 기초한 사회는 그럴듯한 공연이 없다면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막고 연대와 통합을 확보하는 데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88년 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진지한 고민을 촉구하고 있다.
⊙ 세·줄·평★ ★ ★
·서울올림픽을 ‘공연’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은유의 시선이 독특하다
·서울올림픽이 마당놀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군인 연출자들이 가진 배제의 습성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