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완두콩 깍지를 까는 것에 대해

입력 2025-07-04 00:32

콩깍지 까는 게 어떻게 글이 되나 싶지만…
평범한 일에 담긴 삶의 의미를 전달한다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독서 모임이나 글쓰기 수업에서 종종 듣는 질문이다. 좋은 글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없진 않지만, 답을 할 때면 늘 신중해진다. 삶의 중심이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좋다’고 여기는 글의 기준도 조금씩 바뀌기 때문이다. 또 글의 ‘좋음’에는 언제나 맥락적인 면이 있지 않은가. 한 작품이 좋은 글로 읽히는 건, 그 글이 당대의 우리와 어떤 식으로 호흡하느냐에 달려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내뱉은 말을 쉽게 바꿀 수 없으니 ‘좋은’ 글보다는 ‘좋아하는’ 글을 말하려고 한다. 좋아하는 마음은 나의 취향을 넘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글은 삶이 섬세하게 담긴 글, 삶을 향한 작가만의 시선과 사유가 잘 드러나는 글이다. 예를 들면 필리프 들레름의 ‘완두콩 깍지를 까는 일’(산문집 ‘크루아상 사러 가는 길’에 수록됐다)이 그렇다.

들레름의 글은 제목 그대로 완두콩 깍지를 까는 이야기다. 콩깍지 까는 일이 어떻게 글이 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면 바로 그 의심이 당신을 글쓰기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콩깍지 까기를 쓰는 일에는 삶을 쓰는 일의 핵심이 담겨 있으니까.

완두콩 깍지 까기는 대부분 한산한 시간에 이뤄진다. 예를 들면 아침을 먹은 후 조금 어수선한 식탁 위에서. 들레름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한산하지만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시간이다. 여기에 그것을 쓰는 일의 의미가 있다. 한산하지만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의 의미를 쓰는 것.

식탁 위에 껍질째 놓인 완두콩에는 일상에 스며든 계절의 감각이 있다. 식탁이라는 사물 위에서 펼쳐지는 봄과 여름. 봄의 완두콩은 껍질이 연하고 콩알이 아직 단단하지 않아 깍지를 깔 때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반면 여름이 가까워지면 콩알은 더 단단해지고 깍지도 질겨진다. 들레름의 콩깍지는 엄지손가락을 대고 누르기만 해도 껍질이 툭 벌어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봄의 완두콩인 듯하다. 내가 기억하는 완두콩은 초록색 진주처럼 단단한 것이 튀어나오던 초여름의 콩이었다. 그 콩을 까던 사람의 손이 움직이던 리듬을 기억한다. 들레름은 그것을 ‘몸 안에 메트로놈이 있어 거기에 맞춰져 있는 듯한 리듬’이라고 표현했는데, 정말이지 그랬다. 박자가 정확한 춤 같았다. 그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던가. 글 속에서 들레름과 그의 아내가 완두콩을 까면서 나누는 가벼운 대화나 흥얼거리는 노래는 평온함으로 읽힌다. 글자에는 색깔이 없는데, 투명한 볼에 담긴 콩을 상상하면 책장을 넘기는 손에 초록이 묻을 것만 같다. 마지막에 그가 불쑥 ‘빵을 사러 가겠다’고 말하는 문장을 읽으면, 그 다음을 상상하게 된다. 빵을 사러 가는 길에는 또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까.

그렇다. 콩깍지를 잘 까는 글은 모든 게 퍼석하게 말라버린 계절에도 우리를 온통 초록으로 물들인다. 또 우리를 누군가와 식탁에 마주 앉아 있던 순간으로 데려간다. 별거 아닌 일을 하며 별거 아닌 말을 주고받았던 그 시간이 얼마나 별것이었는지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들레름의 글을 통해 작은 일상을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먼저 손끝에서 계절까지 감각이 깨어 있을 것. 또 단순한 기록이 아닌 시간성이 담긴 글을 쓸 것.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 그 작은 일들이 더 큰 감각과 의미와 세계와 연결되게 할 것. 들레름의 글이 아름다운 이유는 단지 일상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삶의 평범한 행위가 가진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전달했기 때문이다.

이제 완두콩 한 그릇을 식탁 위에 올려볼까. 하얀 화면이 초록색 콩으로 가득차게 글을 써 볼까. 무의미하지 않은 시간과 계절, 기억과 감각을 과장이나 축소 없이 말해 보자. 화가가 사과를 그리듯 무수히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당신을 꼭 닮은 아름다움을 찾게 되리라는 것이다. 글자로 변한 완두콩들 사이에서 깍지를 벗은 진짜 당신이 거기 있을 것이다.

신유진 작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