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무신론자의 기도

입력 2025-07-05 03:03

“많은 경험 가운데 가장 행복한 경험은 책을 읽는 것이고,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이다.” 소설가이면서 시인인 보르헤스의 말인데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멘’을 연발할 수밖에 없다. 도서관에서 이어령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다시 읽었다. 저자는 교토의 연구소에 딸린 아파트에 머물며 자취를 한다. 하루는 장을 보러 갔다가 싸게 파는 특상품 쌀을 덜컥 자루째 산다. 택시를 타면 쌀을 싸게 산 의미가 없어지므로 숙소까지 걷는데 점점 쌀자루의 무게에 눌린다. 낑낑대며 겨우 빈방에 들어서자 늘 보던 방은 더 좁고 잡다한 살림 도구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방을 빛이나 향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자, 한 번도 펴보지 않았던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고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경건한 기도를 드린다. 무신론자가 기도를 드릴 수 있다니…. 설명할 수 없는 은총과 신비의 문은 빅뱅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닫힌 적이 없음을 믿는다. 보르헤스의 말이 진실임도 믿는다.

정혜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