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현 목사의 복음과 삶] 세상을 바꾸는 힘

입력 2025-07-03 03:04 수정 2025-07-03 03:04

분노가 넘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어디를 가든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이 있다. 투쟁적이고 폭력성이 넘친다. 분열과 파괴, 그리고 핏기 서린 아우성이 일상이 됐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살풍경을 목격한다. 주도권을 두고 다툼이 첨예하다. 인간은 본성이 권력 투쟁적이다. 가능한 힘을 끌어모아야 산다고 믿는다. 힘으로 사람들을 이용하고 힘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며 산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상이다. 강자의 논리에 집착할수록 살벌해진다. 아침 출근길에도 중무장을 해야 한다. 누가 나를 무시하거나 공격하지 못하도록 날을 세운다. 내 편을 만들고 힘의 연대를 추구한다. 연합의 이름으로 분열을 일으킨다. 이런 세상에서 집단적 광기와 힘과 힘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거칠고 살벌한 세상에서 예수는 전혀 다른 삶의 원리를 가르쳐 주신다.

산상수훈 팔복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는 말씀은 이해하기 힘들다. 온유함이란 유약해 보인다. 온유함으로 과연 이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온유는 예수의 기본적인 성품이며 삶의 태도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예수는 공생애 동안 적대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공격했다.

로마의 정치 권력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간의 야합이 일어났다. 당시 로마제국은 무자비하고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날을 갈지 않으셨다. 세력을 강화하거나 저항하지 않으셨다. 제자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다. 예수의 삶의 방식은 전혀 달랐다.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는 방식이다. 힘을 쓰는 것보다 힘을 빼는 것이 훨씬 어렵다. 힘을 쓰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힘을 빼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힘을 모으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힘 빼기를 가르쳐 주는 곳은 없다. 어설프게 힘을 빼면 더 위험하다. 완전히 힘을 빼고 승리한 사건이 십자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40년간 광야에서 백성들을 이끌었다. 노예 출신 남자 60만, 그들은 모세에게 거칠게 대들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 모세는 백성들과 똑같이 반응하지 않았다. 힘으로 맞섰다면 리더로 세워질 수 없었다. 거친 백성들에 대한 그의 모습은 일관된 온유함이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그는 부드러웠다. 소프트 파워다. 약해 보였으나 약하지 않았다. 온유는 유약함과 거리가 멀다. 도리어 내적 강인함이다. 고도의 자기 제어가 가능해야 스며 나오는 게 온유다. 강함을 자랑하는 자들은 강한 사람이 아니다. 두려움에 가득 차 있을수록 더 강한 척한다. 강하면 부러진다. 온유한 사람은 부딪히지 않는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하자 누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지만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 25:15)고 했다. 온유함은 물과 같다. 흐르는 물은 가로막고 있는 바위와 충돌하지 않는다.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온유한 사람은 무모한 싸움을 야기하지 않는다. 상대가 강하게 나와도 지혜로운 말로 노를 그치게 할 줄 안다. 세게 나온다고 같이 부딪히는 사람은 약하다는 뜻이다.

투쟁은 투쟁을 낳는다. 온유는 언제나 동일한 모습을 드러낸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늘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온유함이다. 내적 평온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온유한 사람은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 반대자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안다. 온유는 적대적 환경에서 빛을 발한다. 온유함은 무리하게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윽박지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태도를 억지로 바꾸려 하기보다 상대의 속도에 맞추어 기다려준다. 조급하면 힘을 주고 싶어진다. 물리적인 힘으로 상황을 자기 방식대로 바꾸면 후유증이 생긴다. 분노를 녹이는 길은 온유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힘이 아니라 온유다. 십자가에서 온유의 극치를 본다. 십자가는 힘의 해체다. 힘의 숭배와 반대의 길이다. 예수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품으셨다.

온유는 두 팔 벌려 원수까지 녹여내는 모습이다. 다른 사람이 실수할 때 누군가 나를 실망시킬 때 온유함이 필요하다. 온유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품성은 아니다. 자연적 본성을 거슬러야 가능하다. 온유한 사람은 세상을 품는다. 품는 만큼 사람을 얻는다. 결국 실력이나 재능보다 성품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기술이나 재능만으로는 안 된다. (부산 수영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