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쪽지] 바보같이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

입력 2025-07-05 00:33

어느 지인이 말했다. 주변 사람들 중 부모가 강남 아파트를 물려주고 돌아가신 경우 예외없이 형제 간에 송사가 걸려 있다고 말이다. 아파트 가격이 엄청나니 분배 비율을 합의하기가 어렵기는 할 것이다. 한 명만 욕심을 부려도 일은 어그러진다. 다른 모든 형제가 당해주는 수준으로 참아주어야만 송사까지 가지 않을 수 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는데 내가 바보같이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은 요즘의 상식이다.

독일의 현대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의사소통 행위와 전략적 행위로 구분했다. 의사소통 행위의 목적은 상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고, 전략적 행위의 목적은 영향력 행사다. 사람마다 전략적 행위의 비율이 높은 사람이 있고 의사소통 행위의 비율이 높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의사소통 행위에는 관심도 없이 전략적 행위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우리 모두가 체감하고 있다.

전략적 행위의 수단은 돈과 권력이다. 돈과 권력은 사회적 행위를 편리하게 조정해주는 효과적인 매체이다. 그러다보니 돈과 권력으로 조정되지 말아야 할 영역까지도 돈과 권력으로 조정되는 상황이 됐다. 하버마스는 전략적 행위를 해야 할 영역이 있고, 의사소통 행위를 해야 할 영역이 있는데 현대사회는 이 구분이 무너졌다고 말한다. 돈과 권력으로 조정되지 말아야 할 영역이 돈과 권력으로 조정되면 문제가 생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돈으로 조정되다보니 인간관계로 인한 정서적 안정은 점점 줄어든다.

상대방이 전략적 행위로 나올 때 내가 의사소통 행위를 하고자 하면 나는 상대방에게 당하게 된다. 그러니 사회에서는 의사소통 행위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주로 전략적 행위에 능한 사람들이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으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금명에게 대리시험 대가로 아파트 한 채를 부르던 과외 학부모는 딸에게 말한다. “내가 조질 것이냐 조짐을 당할 것이냐 그거는 순간 선택이라고. 단물 빠진 것들 사정 봐줄 필요 일절 없어. 너도 인정 나부랭이에 휘둘리지 말고 칼같이 살아. 엄마는 그렇게 돈 벌었어.” 그 말을 듣고 딸은 말한다. “그러니까 엄마도 돈 잘 벌어와. 엄마도 단물 빠지면 큰일 나.”

상대방이 전략적 행위를 할 때 내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의사소통적 행위를 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건 그냥 각자의 선택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자 하는지에 따른 각자의 선택이다. 상대방이 전략적 행위를 통해 현실적 이익을 얻을지라도 나는 의사소통 행위를 할 수 있다. 전략적 행위 과잉의 시대에 이 무슨 소리인가 싶을 지경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런 선택을 하시는 분들 덕분에 세상이 이만큼이나마 유지된다. 전략적 행위의 과잉 시대에 의사소통적으로 행위하고 싶으신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스스로가 인간이고 싶어서 그러신 거라고. 형제 간에 절연하게 만들지만 죽을 때는 놓고 가야 할 부동산에 아귀다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인간이고 싶어서라고 말이다.

박은미 철학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