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탤지어도 모르면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나오는 제주 소녀 애순은 꿈이 크다. 자신이 문학소녀임을, 제주라는 섬에 평생 갇혀 있을 사람이 아님을 신앙처럼 갖고 있다. 서울에 가고 싶고 대학에 가고 싶은 애순의 꿈에 어울리는 남자는 ‘노스탤지어’를 말하는 청마 유치환의 시 정도는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애순의 짝이 되는 것이 꿈의 전부였던 관식은 군대 갓 전입한 이등병 같은 빳빳한 목소리로 청마의 ‘깃발’을 외움으로써 애순의 기준을 통과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어떻게 해서라도 고향을 벗어나려는 주인공의 갈망이 집약된 시어가 하필 노스탤지어, 향수(鄕愁)라는 점 말이다. 젊은 연인들은 제주를 탈출하지만 바깥에서 경험한 세상은 폭풍치는 제주의 바다보다 더 거칠었다. 그들의 계획이 촘촘하지 못했으니 균열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 근저에는 고향을 떠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향수라는 단어에 담아 표현하는 언어의 균열이 자리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는 청마의 시에서 유래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굳이 낯선 외국어로 표현한 것은 왜일까. 그 고향은 현실의 번지수를 가진 지점이 아니라는 암시다.
노스탤지어라는 시어의 대중적 성공은 얼마간은 지적 허영, 또 얼마간은 뭔가 다른 삶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는 갈망이 교차하는 자리에 있다. 결코 도달할 수 없지만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움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며, 그렇기에 이 땅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인 갈망이 있다.(히 11:13~16) 그들의 존재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교회가 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 정든 집을 팔면서 애순이 남편에게 “당신이 내 집이지!”라고 한 말은 훌륭한 교회론적 진술이기도 하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동체가 그리스도인의 집이다.
세상에서 충족되지 못하는 갈망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노스탤지어가 머무는 곳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주인 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모든 차이가 용해되고 차별이 극복되는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꿈이 있다. 예배에 올 때마다 기대에 설레고 나갈 때마다 뿌듯한 기쁨으로 가득 찬 교회, 경쟁 사회에서 소외되고 냉대를 당할 때마다 그리워지는 어머님 품 같은 교회. 그러나 현실의 교회는 이 이상에 턱없이 모자란다.
가끔, 아주 가끔씩 교회가 그 이상에 근접한 때가 있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가 그렇게 출발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분열과 속임수로 얼룩졌다. “다시 거룩한 교회로”라는 슬로건이 있다. 노래까지 지어 부른다. 그러나 언제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교회가 과연 한 번이라도 아쉬움 없이 거룩했던 때가 있었던가. 예수의 처음 제자들이 예수를 배신했듯이, 제도 교회의 역사는 배신과 불순종의 역사였다. 새로운 교회를 꿈꿨던 종교개혁가들도 이내 무의미한 논쟁 속에 길을 잃었고 청교도들의 순수했던 열정도 경직된 율법주의로 굳어져 버렸다.
“다시 거룩한 교회”를 외치는 이들의 마음에는 교회의 고도성장시기, 좋은 위치에 그럴듯한 건물을 세워 놓으면 미어터질 듯이 몰려들던 시기에 대한 향수가 있다. 그 시절 성장과 부흥을 이루어낸 성도들과 목회자들의 노고와 헌신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병폐가 그 시기에 뿌려진 씨앗에서 자라난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명성이 바닥에 떨어진 지금이 우리가 겸손해질 수 있는 기회, 서로가 서로에게 집이 돼 주고 교회가 돼 줄 기회다. 이런 교회를 향한 동력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심어 놓으신 노스탤지어에서 나온다. 제도 교회가 잘나가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예수님이 꿈꾸셨던 공동체,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교회에 대한 갈망이다. 그 갈망이 소망이 되고 실천될 때, 교회가 다시 그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에 근접해 가는 시대가 열릴 것이다.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