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한반도 비핵화, 실현 불가능한 목표

입력 2025-07-02 00:50

중동·카슈미르 분쟁 해결하고
북핵 해결 자신감 얻은 트럼프

'핵보유국' 지위 보장 없이는
협상에 나설 이유 없는 김정은

곧 시작될 북·미 협상 대비해
우리도 대북 전략 다시 세워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시선이 북한을 향한다. 구체적인 행동에 나선 건 아니지만 조금씩 분위기를 잡아가는 중이다. 계기는 이스라엘·이란 휴전 합의다. ‘힘을 통한 평화’가 효과가 있다는 자신감은 틀어진 북한과의 관계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기대로 이어졌다. 트럼프는 며칠 전 백악관 집무실에서 “김정은과 잘 지내고 있다. 북한과 갈등을 해결하겠다”고 장담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향해 근거가 부족한 친밀감을 드러낸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인도·파키스탄 무력충돌 중재에 이어 20년 넘게 교착상태였던 이란 핵협상을 극적으로 유리하게 뒤집은 직후여서 블러핑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트럼프가 준비한 카드는 무엇일까. 상식을 뛰어넘는 제안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동이 특기인 트럼프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심사가 잔뜩 뒤틀린 김정은을 협상 테이블로 어떻게 불러내고, 무엇을 줄지 궁금증은 커진다. 새롭고 기발한 무언가로 비핵화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접근은 한반도 핵위기의 심각성을 희화화할 뿐이다. 어느날 갑자기 트럼프가 김정은을 얼싸안고 극적인 합의를 이루는 장면은 마블 만화에서 지구를 지키는 히어로들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그런 점에서 포린어페어스 2025년 7·8월호에 실린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의 기고문은 냉정하다. 기고문에 따르면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보다 상황은 미국에게 더 나빠졌다. 북한은 미국 본토를 실질적으로 위협할 무기를 개발할 것이다. 트럼프 개인의 캐릭터를 떠나 미국 대통령은 미국 국민을 향한 핵위협을 제거할 의무가 있다. 트럼프는 ‘과감하고’ ‘기존 틀을 깨는’ 조치를 포함한 대북 정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느 미국 대통령도 내놓지 않을 파격적인 양보가 될 것이란 게 차 석좌의 현실 인식이다. 그래서 기고문의 제목은 ‘크고, 대담하고, 매우 나쁜 대북 합의에 대비하라’다.

김정은은 트럼프와의 협상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바로 핵보유국 지위다. 이는 비핵화라는 전제조건을 걷어내지 않고서는 김정은을 협상 테이블에 앉힐 수조차 없다는 것을 뜻한다. 트럼프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취임 첫날부터 북한을 ‘핵보유국’이라고 했다. 우리 정부와 미국의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협상전략일 뿐이라고 했지만 트럼프에게서 100% 장담할 사안은 없다. 더구나 미·북 협상은 결국 한반도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 미국은 본토 방위 관점에서 북핵 문제를 다룰 것이고, 트럼프는 그 결과가 동맹의 안전을 위협하더라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인도·파키스탄 무력충돌은 카슈미르 민병대의 관광객 테러로 촉발됐다. 파키스탄은 물론이고 인도 역시 확전을 원치 않았지만 명분 없이 끝낼 수 없었다. 양측 모두 약속대련을 실감나게 연출할 무대감독이 절실했고, 미국은 그걸 잘 해냈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휴전은 전쟁을 피하고 싶은 이란 정부의 필사적인 몸부림의 결과다. 여기서도 무대감독을 자처한 트럼프의 쇼맨십이 돋보였다.

하지만 북한은 다르다. 지금 김정은은 북한 주민에게 화려한 정치적 제스처를 보여줄 이유가 없다. 중국은 북핵 협상의 지렛대가 될 의사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시큰둥했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강력한 후원자로 돌아왔다. 악으로 버텼더니 국제제재도 견딜 만하고, 경제는 드디어 바닥을 쳤다. 북한이 먼저 협상하자고 미국에게 손을 내밀 이유가 없는 것이다. 김정은이 트럼프의 ‘연애 편지’를 거부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핵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북 전략의 골격을 다시 짤 시간이 됐다. 북한에 핵무기가 없다는 자기 기만과 남한에 사용할 리 없다는 낭만적 최면 상태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 북한 정권이 붕괴하지 않는 한 핵포기는 없다는 현실도 인정해야 한다. 지금 한반도 상황에서 북·미 협상은 불가피하다. 빠르면 오는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직후가 될 수도 있다. 트럼프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원칙을 버리고 협상을 시작할지 모른다. 주한미군 전략적 재배치는 미국이 오랫동안 신중하게 추진한 전략이다. 트럼프가 협상에서 이를 대북 지렛대로 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고승욱 수석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