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다시 보기

입력 2025-07-02 00:32

읽은 책 또 읽고 싶은 이유는
다시 또 만나고 싶은 마음이
소중한 인연을 선사하기에

종종 읽은 책을 또 읽는다. 책 방송 같은 일 때문에 다시 읽기도 하지만, 순전한 흥미 때문에 다시 읽기도 한다. 이번에 또 읽은 책은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이었다. 세 번째인데도 새로운 재미를 느꼈다. 예전에 웃지 않았던 대목에서 깔깔대기도 했다. 소설의 경우 대여섯 번 완독한 작품도 있고, 어떤 에세이는 너무 마음에 들어 한동안 들고 다니며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었다. 페이지의 양으로만 계산하자면 스무 번 완독한 분량 정도는 읽은 것 같다. 그래서 자문했다. 왜 이렇게 읽은 책을 또 읽고 싶어 할까.

이 질문에 나의 다른 자아가 반문한다. 한 번 먹고 맛있는 음식은 또 먹지 않는가. 그렇다, 답은 여기에 있었다. 책을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이유는 지적으로 굶주려 있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나아가 하루를 살아내는 데 굳이 책이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리라.

반면 지적 자양분에 곯고 목마른 사람은 끼니마다 메뉴를 고민하듯 무슨 책을 펼쳐볼까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맛이 확실한 음식을 다시 먹고 싶듯 재미와 보람을 확실히 보장해 주는 책은 다시 읽고 싶어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책을 좋아하지만 다시 읽지 않는 사람도 많다. 지적 갈급함을 느끼면서 읽은 책을 다시 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조심스럽지만 그런 분은 아마 결론 중심의 독서를 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여긴다. 소설은 물론이거니와 인문학 서적도 그 책이 담고 있는 지적 논리를 일종의 ‘서사’로 여기기에 결론을 깨달으면 다시 읽기에 김이 새어버리는 것이다.

한데 책을 여러 번 읽는 사람으로서 궁금하기도 하다. 정말 결론 위주의 독서가 ‘책 읽기의 행복’을 모두 선사해 줄 수 있을까.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느끼는 문장의 흥미와 캐릭터의 매력, 그리고 행간의 의미를 깨달을 때의 기쁨은 더 크지 않은가. 인문학 서적이라면 저자가 전개하는 논리의 흐름 역시 다시 읽어봐도 감탄이 새어나오거나, 때론 내 생각을 발전시키며 비판적 독서를 하는 재미도 만만찮지 않은가. 게다가 어떤 작가는 결말을 위해서가 아니라 문장을 위해, 행간의 뉘앙스를 위해, 혹은 독자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한 장면을 위해 혼의 일부를 쏟아 집필한다. 그래서일까. 다시 읽으면 처음 읽을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구조가 눈앞에 펼쳐지기도 하고, 침묵했던 등장인물들이 어느덧 말을 걸기도 한다.

더군다나 흥미로운 책을 만나는 일은 실로 귀하다.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독서한다는 건 상당한 노동이다. 몸과 영혼을 적게는 며칠, 많게는 몇 달을 한 권에 쏟아부어야 한다. 그 긴 시간 후에 내가 읽은 책이 별로였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래서 훌륭한 책을 만나면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진다. 진귀한 발견과 관계를 쉬이 접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귀한 감동을 한 번만 느끼고 싶지 않아 또 같은 책을 펼쳐본다.

궁극적으로, 적어도 내게는 독서가 창작을 준비하는 단계이자 잠재적인 창작 행위다. 요컨대 늘 쓰고 싶은 마음이 책을 펼치게 한다. 확장하자면,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은 이유는 결국 ‘나도 이렇게 쓰고 싶다’라는 욕망이 꿈틀거렸기 때문인 것이다. 나도 수려하지만 명징하고, 담백하지만 깊이 있게 써보고 싶은데 그리 써지지 않는 답답함에 다시 펼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책을 읽을 때는 생각한다. 이 책은 완독의 대상인가, 읽다 그만둘 대상인가. 다시 읽고 싶은 책은 대부분 읽는 중에도 또 읽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 첫 만남에 또 만나고 싶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책을 보는 것과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 이 글을 쓰고 난 후 다시 자문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또 보고 싶은 사람인가….

최민석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