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수를 다녀온 것도 벌써 1년 저편의 일이 됐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늦여름 동네 도서관 공터를 뛰어다니던 딸아이의 뒷모습, 중남미의 작은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가 찾았던 바닷가 식당, 보스턴에 갔다가 뉴저지로 돌아오던 길에 마주한 드넓은 들판…. 돌이켜 보면 그때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삶의 절정이 지나가고 있노라고 여겼던 것 같다. 저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느낀 똑같은 감흥이었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그때마다 모두 하늘이 살구빛으로 물든 해질녘이었다는 것이다. 석양은 인간의 마음을 달짝지근하게 만드는 감미료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러니 저토록 객쩍은 생각에 젖었던 것 아니겠는가.
아무튼 연수 기간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내 앞에 펼쳐진 삶은 예상대로였다. 토끼굴에 빠진 것처럼 우왕좌왕 헤매다가 순식간에 하루가 지나가는 일이 반복됐고 그때마다 나는 미국에서 마주한 숱한 ‘석양의 시간’을 되씹곤 했다. 따지고 보면 서울에서는 해넘이를 보면서 어제를 되짚고 오늘을 곱씹으면서 내일을 상상하기 힘들다. 만약 사전을 만든다면 ‘행복’이라는 표제어에는 이런 뜻을 붙여도 무방할 것이다.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수평선이나 서산 저편을 빨갛게 물들이는 저녁놀을 바라볼 때 느끼는 기분이라고.
많은 직장인이 여름휴가를 고대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사람들은 여름휴가 덕분에 1년에 며칠이라도 낯선 곳에서 일몰을 보며 여유를 느끼곤 한다. 한데 길어야 일주일 안팎인 여름휴가는 누구에게나 감질나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모든 직장인에게 몇 년에 한 번이라도 강제적으로 안식월이 주어지면 어떨까 상상하게 되는 건 이런 현실 때문이다. ‘안식월 법제화’는 실현 불가능한 망상인 걸까. 한국 직장인에게 주어지는 ‘휴식 제도’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연차휴가다. 1953년 근로기준법을 제정할 때부터 존재한 ‘연차유급휴가제도’는 꾸준히 개선돼 지금은 ‘사업 운영에 막대한 지장’만 초래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연차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적어도 법적으론 말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이 휴가를 쓰기란 어려울 때가 많다. 특히 몇 주에 걸쳐 몰아서 사용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근로자 휴가 조사’ 결과를 보면 전년도 연차 소진율은 77.7%였으며 ‘원하는 시기에 언제든 연차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한 응답을 100점 만점 기준으로 점수를 매겼을 때 77점이었다. ‘5일 이상의 장기 휴가’를 사용한 비율은 8.9%에 불과했다.
휴가의 의미는 쉽게 정의할 수 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헌법재판소가 2015년 내놓은 연차휴가와 관련된 결정문에서도 이 문구는 그대로 쓰였다. 안식월은 연차휴가를 일주일쯤 사용해 떠나는 여름휴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그 자체가 선사하는 기쁨을 만끽하게 해주는 제도다. 물론 특수고용노동자나 자영업자에게 안식월 법제화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는, 어쩌면 박탈감마저 느끼게 하는 정책일 수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AI)과 자동화라는 흐름 탓에 일터에서 인간 노동력의 쓸모가 점점 사라지는 상황에서 대대적인 휴가제도 개편은 진지하게 검토할 만한 문제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기술 혁신의 충격파는 지구촌 곳곳에 ‘사회적 탈구’를 일으킬 것이다. 인간이 일할 일터는 줄고 양극화는 심해질 머지않은 미래, 어쩌면 안식월 법제화는 일자리를 나누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더 자주, 그리고 더 오랫동안 석양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박지훈 디지털뉴스부장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