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아파트’는 한국 재건축의 ‘끝판왕’으로 여겨진다. 건설부동산 및 정비업계는 강남 부촌의 대명사인 압구정 아파트들이 재건축되면 향후 한국 아파트의 정점을 쓸 것으로 본다. 한남, 성수, 용산, 여의도, 목동 등 여러 금싸라기 땅 중에서도 압구정이 최정점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압구정 재건축 사업은 총 1~6구역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이중 속도가 가장 빠른 2구역(신현대 9·11·12차)이 압구정 재건축 첫 주자로서 오는 9월 시공사 선정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최근 ‘사건’으로 정비업계가 술렁였다. 국내 시공능력 1·2위(2024년 기준) 삼성물산 건설부문과 현대건설의 맞대결이 기정사실화됐으나 삼성물산이 돌연 입찰을 포기하면서다. 이 때문에 삼성물산의 불참 배경과 향후 압구정 수주전에서의 파급효과에도 업계의 관심이 쏠린다.
2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삼성물산은 지난달 20일 압구정 2구역 재건축조합에 시공사 선정 입찰 불참 의사를 전했다. 삼성물산은 공문에서 “조합 입찰 조건을 검토한 결과 이례적인 대안 설계와 금융조건 제한으로 당사가 준비한 내용을 충분히 제안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조합은 지난달 대의원회의에서 대안설계 범위 대폭 제한, 모든 금리 양도성예금증서(CD)+가산금리 형태로만 제시, 이주비 주택담보대출비율(LTV) 100% 이상 제안 불가, 추가이주비 금리 제안 불가, 기타 금융기법 등 을 입찰 지침을 통과시켰다.
일견 동일한 입찰 조건임에도 삼성물산이 불리하다고 여긴 이유는 해당 제안들이 삼성물산이 가진 강점을 제한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크게는 대안설계와 금융조건 제한이다.
삼성물산은 압구정2구역에 오래 공을 들여온 현대건설에 역전하기 위한 카드로 세계적 건축가와의 협력, 비교우위에 있는 금융조건을 준비했다. 우선 세계적인 건축 거장인 노만 포스터가 이끄는 영국 글로벌 유명 건축 설계사 ‘포스터 앤드 파트너스’와 혁신적인 대안 설계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노만 포스터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미국건축가협회(AIA) 골드메달, 영국왕립건축가협회(RIBA) 로열 골드메달 등 건축계 최고 영예를 석권한 인물이다.
하지만 조합 측에서 대안설계 범위를 대폭 제한했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압구정을 향후 한국 랜드마크로 염두에 두고 세계적 건축가를 영입했는데, 이례적인 대안설계 제한으로 준비한 설계에 지장이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삼성물산 측은 이미 노만 포스터 측에 설계를 맡겨 일부 진행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주비 LTV 100% 제한 등 금융조건도 삼성물산에 불리하다고 봤다. 삼성물산은 국내 건설사 중 유일한 최고 신용등급(AA+)을 보유하는 등 경쟁사보다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한남4구역 수주전에서도 삼성물산은 추가 이주비에 LTV 150%을 내걸었는데 압구정2구역에서는 이 같은 조건을 걸 수 없게 됐다.
일각에서는 이번 입찰조건 자체가 조합의 현대건설 선호였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압구정 신현대 인근 부동산 대표는 “조합원들이 애초에 현대로 기울었던 것 같다”며 “입찰조건을 보면 삼성물산이 비집고 들어오려던 걸 다 틀어막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현대건설이 압구정 프리미엄을 갖고 있고, 한 발 앞서 조합과 소통해온 상황에서 입찰 조건이 강점을 제한한다고 보고 삼성물산이 일찍 빠져나왔다는 해석이 나온다.
국민일보는 압구정2구역 재건축조합을 방문해 문의했으나 조합 측은 “언론 응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다만 조합 측이 사업 속도에 방점을 찍었다는 시각이 있다. 압구정 2~5구역은 서울시 신속통합기획(신통기획)으로 추진 중인데 주동 위치, 층 수, 가구 수 등이 확정된 상황에서 대안설계를 수용하면 계획이 틀어지고 속도도 늦어질 것이라는 우려다.
삼성물산의 전격 철회가 압구정 2구역 재건축에 미칠 영향은 시각이 엇갈린다. 한편에선 조합이 양측을 최대한 경쟁시켜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데 무리한 입찰조건으로 제 발등을 찍었다고 본다. 압구정 신현대 인근 부동산 대표는 “조합원들이 현대건설을 많이 민 것 같은데 삼성물산이 아예 빠져버려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어그러진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정비업계 관계자는 “삼성물산의 빠른 엑시트는 조합으로서 이득이 아닌데 의아하다. 일부 조합원들이 당황한 기색이다”라며 “경쟁에 들어가면 양측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더 꺼내는데, 삼성물산이 빠져버리면 현대건설이 준비해왔던 카드들을 굳이 내놓을 필요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반면 압구정 타 구역의 후발주자들, 특히 ‘대어’로 꼽히는 3구역 수주를 위해 현대건설이 2구역 재건축에 혼신을 다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압구정은 다른 재건축 조합처럼 생각해선 안 된다”며 “압구정 다른 구역에서 2구역의 상황을 지켜볼 것이기 때문에 여봐란듯이 지어내면 현대건설이 전구역을 다 먹을 수도 있다. ‘압구정 현대’라는 그들의 정체성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압구정2구역 재건축사업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 9·11·12차를 지하 5층~최고 65층, 2571가구 규모 주택으로 공급하는 사업이다. 총 공사비는 약 2조7488억원, 입찰보증금만 1000억원이다. 조합은 오는 8월 11일 입찰을 마감한 뒤 9월에 시공사 선정 총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권중혁 정진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