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막 사춘기에 접어든 듯한 학생이 법원 조정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학교폭력 사건 조정이 예정된 날이지만 보통 부모들만 출석하고 학생이 직접 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기에 조정을 진행하는 나 역시 조금 긴장됐다.
‘한창 예민한 시기에 어른들의 말에 상처받지는 않을까?’ ‘부모와 함께 들어오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학생만 따로 불러서 먼저 이야기를 나눌까?’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오가던 중 조정을 시작할 시간이 됐다.
“위원님, 학생은 같이 들어오라고 할까요?” 안내 직원이 물었다. “학생 이름이 어떻게 되죠?” 이름을 전해 듣자 사건의 윤곽이 떠올랐다. 친구가 화장실에서 폭행할 때 망을 봤던 아이였다. 소년재판은 이미 끝났고, 피해자가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다시 법원에 나오게 된 것이다. “네, 함께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나는 간단히 소송기록을 다시 확인하고 조정실로 들어섰다.
학생의 아버지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아이가 직접 사과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서 학교를 빠지고 데리고 왔습니다.” 학생은 맨 뒷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학교도 결석하고 왔구나. 어렵고 불편했을 텐데 용기 내줘서 고맙다.” 내 말에 학생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학교폭력 조정을 하다 보면 반복해서 듣는 말이 있다. 피해자 측은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사과를 받은 적 없다”고 하고, 가해자 측은 “연락처를 몰라서 사과하고 싶어도 못 했다”고 하는 것이다. 피해자 보호를 위해 접근금지 조치가 내려지고, 서로의 연락처는 개인정보 보호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가 열리고, 경찰 조사와 소년재판까지 마무리된 후 민사재판에 이르기까지 벌써 2년여의 시간이 지나버렸다.
가해학생의 부모는 초반에는 충격을 받지만 재판을 거치며 아이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강해진다. 그러다 보면 오히려 피해자 측을 원망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폭행을 주도한 학생과 그 부모는 조정에 응할 의사가 없다며 출석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자리에 나온 학생은 상대적으로 가담 정도가 낮은 편이었다. 사과의 자리에 먼저 나서는 쪽이 꼭 더 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 일부러 용기 내서 왔으니 직접 부모님께 사과해 볼까.” 나는 조심스럽게 학생에게 말했다. “제가 선배인데, 후배를 잘 챙기지 못하고 피해를 줘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아이는 말을 마친 후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피해자의 부모는 몇 분이 흐른 후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래. 반성했다니 다행이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피해자 가족은 사건 이후 이사를 하고 아이와 여행을 자주 다니며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덕분에 아이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조정실 밖으로 학생을 내보내고, 남은 어른들끼리 손해배상 관련 대화를 이어갔다. 결국 양측은 조정에 응하기로 했고, 법원에서 적절한 조정안을 송부하기로 했다.
용서를 구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보다 더 잘못한 사람도 있는데 왜 나만 사과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먼저 용서를 구하는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그리고 내 삶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반대로 사과를 받아들이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상대가 사과하지 않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막상 누군가 용서를 구할 때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그렇다. ‘용서를 구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누군가를 용서할 용기를 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