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나는 부산 감천중앙교회를 다녔다. 교회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외롭고 슬프고 화가 날 때 무작정 집을 나섰다. 발 길가는 대로 걷다 보면 어느새 교회 문 앞이었다. 할 일 없이 바닥을 뒹굴기도 하고 풍금을 치며 노래하거나 춤을 추기도 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교회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아이들과 선생님, 청년부 언니·오빠들까지 매일 모여서 발표회 준비를 했다. 실은 준비는 뒷전이고 놀기에 바빴다. 꾸벅꾸벅 졸면서 기어코 새벽송을 따라다닐 때조차 그저 즐겁기만 했다.
하나님은 내 관심 밖이었다. 내 부모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단지 교회 생활이 좋았다. 고신대에 입학한 후에는 공부는 뒷전이었고 아예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교회 근처에는 모자원이 있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돌봄을 받지 못해 결핍이 있는 아이들이 불쌍했다. 매주 이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오고 예배 후 다시 데려다주길 반복했다. 설교부터 성가대 지휘, 찬양발표회 등 각종 행사까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전임 사역자처럼 일했다. 그저 아이들이 좋았고 가르치는 일이 재밌었다.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어느 날 대예배 중에 갑자기 천둥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믿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가르치느냐.” 사실이었다. 교회는 무보수로 일하는 직장이었고 나는 교회로 출퇴근하는 직원이었다. 양심의 가책이 심하게 몰려왔다. 아이들 앞에서 더는 위선 떨 수 없었다.
그날로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교회를 떠났다. 일이 없어지니 교회 갈 이유도 사라졌다. 1년쯤 지나자 갑자기 하나님이 계시는지 궁금해졌다. 오산리금식기도원 무척산기도원 등 유명하다는 기도원은 다 다녔다.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밥 먹듯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무신론과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 책을 탐독했다. 공허함은 깊어졌고 그럴수록 죽음은 의미 있게 다가왔다. 날마다 죽을 궁리를 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나에게 주님이 찾아왔다. 보다 못한 언니가 억지로 데리고 간 예배자리였다. 십자가 사랑을 깨닫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밤낮으로 성경을 읽었다. 꿀 송이보다 달았다. 텅 빈 마음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찼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왔던 인생 질문들은 단숨에 해결됐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고신대 복음병원에 취업해 의무기록사로 일했다. 첫 직장이라 온 힘을 다했다. 식사시간조차 아까워 비스킷과 커피로 때우며 일에 매달렸다. 결국 폐결핵에 걸렸다. 병은 나를 멈추게 했다. 밥 먹고 일하고 돈 버는 일상이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그때 디모데후서 4장 7절 말씀이 내게 찾아왔다. 나에게 물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으며, 종착지는 어디이며, 내가 싸워야 할 선한 싸움은 무엇일까.’
가야 할 길은 안보였지만 이 길이 아님은 분명했다.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1984년 무작정 고신대 대학원 기독교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