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추진해온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사업이 좌초 위기를 맞았다. ‘한강 프로젝트’로 불리며 1차 실거래 실험에만 350억원이 투입됐지만, 2차 테스트를 앞두고 사업을 잠정 중단한 것이다. 7~8년에 걸쳐 연구·개발을 이어 온 결과가 이 정도라면, 한은이 디지털 전환의 흐름에 한참 뒤처지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간 한은은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에 대해 “화폐로서 가치가 없다”고 폄하해왔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 진행해온 공공 디지털 화폐 실험은 상용화 일정조차 없이 지지부진했고, 수십억 원의 비용을 부담해온 은행들이 강하게 반발하자 2차 테스트를 보류하게 됐다. 무엇보다 CBDC의 핵심으로 제시된 ‘예금 토큰’은 결제 기능 측면에서 스테이블코인과 상당 부분 겹친다. 이에 따라 디지털 화폐 정책의 정체성과 방향에 대한 내부 혼선이 커졌고, 이 또한 사업 중단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은행들은 블록체인 기반의 페이 업체, 핀테크 기업, 코인거래소 등과 협업하며 스테이블코인 발행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새 정부도 관련 법제화 논의를 본격화하면서, 금융 질서 전반이 급격히 재편되는 흐름 속에서 한은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한은은 그간 디지털 통화의 통화정책 주도권을 지키겠다며 실험을 이어왔지만, 결국 불확실한 일정과 중장기 방향 부재로 민간보다 한참 뒤처진 모습이다. 은행들은 한은의 요청에 따라 전산 시스템을 구축하고 테스트에 참여했으며, 기술적 리스크도 감수했지만, 실험 이후의 상용화 계획조차 없는 상황에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디지털 화폐의 흐름은 이제 명백히 민간의 기술 주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가상화폐에 부정적이었던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조차 최근 “가상자산 산업은 지난 몇 년 동안 성숙해졌으며 이제는 주류가 됐다”고 인정하는 발언을 내놓았다. 한은은 시대 흐름을 인정하고, 더욱 민첩하고 실용적인 정책 재정립에 나서야 한다.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한다’는 수구적인 자세에 얽매이기보다 국민에게 실질적인 안정성과 편의성을 제공하는 것이 정책의 본질이어야 한다. 통화 주권 역시 기술 혁신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