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데뷔 20년 차가 된 배우 박보영(35) 앞에는 ‘믿고 보는 배우’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대중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각인돼 있지만, 지금껏 그가 보여준 연기 스펙트럼은 그런 이미지에만 가둬둘 만큼 좁지 않다. 동그랗게, 동심원을 점점 키워가듯 성장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박보영은 매번 작품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연기 반경을 넓혀왔다.
박보영은 29일 종영한 tvN 인기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일란성 쌍둥이 1인 2역에 도전했다. ‘미지의 서울’은 엄마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똑 닮은 쌍둥이 자매 미지와 미래가 인생을 바꿔 살아보며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런 설정 때문에 박보영은 사실상 1인 4역을 소화해야 했다. 동생 미지와 언니 미래, 미래인 척하는 미지, 미지인 척하는 미래를 각기 다르게 연기해냈다. 상황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인물의 내면을 포착해 섬세하게 그려낸 연기에 호평이 이어졌다.
“작품 할 때마다 최선을 다하긴 하는데, 이번엔 (역할이 2개라) 배로 노력을 해서인지 반응이 남다른 것 같아요(웃음). 살짝 얼떨떨한 느낌이 듭니다.”
종영을 앞둔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BH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만난 박보영은 “각본으로 읽었던 것보다 더 풍부한 결과물이 나온 것 같아 행복감과 뿌듯함을 느낀다”며 “1인 2역이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는데 많은 분이 사랑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행복하다”고 미소를 지었다.
한 작품에서 1인 2역을 하는 건 배우에겐 꽤 큰 모험이다. 성공하면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사실 베테랑 배우들도 좋은 평가를 얻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박보영은 “제게는 큰 도전이었다”면서 “촬영 초반에 감독님이 1회 편집본을 보여주셨는데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 미지와 미래로 보여야 하는데 그냥 ‘박보영’으로 보이더라. 목소리 톤부터 다시 수정해 나갔다. 결과적으로 편집본을 본 게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미지와 미래는 성격도, 처한 상황도 정반대다. 고교 단거리 육상선수였던 미지는 발목 부상으로 꿈이 좌절된 뒤 마음의 문을 닫고 수년간 방 안에서만 지내다 겨우 세상 밖으로 나온다. 시골에서 일용직을 전전하며 살면서도 천성이 명랑하고 다정하며 솔직하고 씩씩하다.
반면 선천적 심장병을 앓던 미래는 특출하게 공부를 잘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서울 금융공기업에 취직하며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냉철하며 굽히지 않는 성격 탓에 상사의 비리를 고발한 동료의 편에 섰다가 지독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드라마는 미래가 투신 시도를 할 정도로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지가 당분간 역할을 대신하겠다고 제안하면서 전개된다. 노란 단발머리였던 미지는 염색하고 머리를 붙여 미래의 긴 생머리를 한 채 출근하고, 미래는 머리를 단발로 자른 뒤 시골집으로 향한다.
박보영은 표정과 말투, 몸짓, 걸음걸이까지 달리하며 두 인물을 세밀하게 차별화했다. 세세한 설정도 더했다. 이를테면 덤벙대는 미지는 잔머리가 삐져나오게 머리를 묶고, 빈틈없는 미래는 화장할 때 아이라인 점막까지 채워 꼼꼼히 그린다. 또 시골에서 지낸 미지 얼굴엔 주근깨가 있어 세수를 하면 선명히 드러난다.
이처럼 치밀한 준비에도 다역은 벅찬 일이었다. 박보영은 “대역 배우와 호흡을 맞출 때 제가 했던 연기를 상대가 똑같이 해주셔야 거기에 맞춰 리액션을 할 수 있는데 쉽지 않더라”며 “컴퓨터그래픽(CG) 처리를 하고 보니 시선 높이가 안 맞는 경우도 있었다”고 돌이켰다.
이어 “대사량도 많아서 매번 ‘이걸 다 외울 수 있을까’ 걱정했다”면서 “처음 경험해본 것들이 많았는데, 그만큼 성장하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학창시절 연기는 아역 배우(이재인)가 맡아 그나마 다행이었다면서 “제가 아역까지 했으면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웃어 보였다.
극 중 미지는 서울을 동경하지만, 막상 미래를 대신해 서울살이하면서 고단한 일상을 마주한다. 실제로 지방에서 성장한 박보영은 미지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는 “과거 저에게도 서울은 높은 빌딩과 휘황찬란한 야경이 있는 ‘미지의 세계’ 느낌이었는데 서울에 와서 일하다 보니 정말 녹록지 않더라”고 했다.
실제 성격도 미지와 좀 더 가깝단다. “MBTI 검사를 해보면 제 성격은 미지 60에 미래 40 정도이지 않나 싶어요. 예컨대 사회생활을 할 때는 미지에 가깝고, 친구들을 만나는 등의 일상에선 미래의 모습도 있는 것 같아요.”
극 중 미지는 변호사가 된 고교 시절 첫사랑 호수(박진영)와 연인이 되고, 미래는 미지 대신 일 하게 된 딸기밭 주인 세진(류경수)과 ‘썸’을 시작한다. 박보영은 “호수가 방방 뜨는 미지를 따뜻한 에너지로 눌러준다면, 세진은 심연에 가라앉은 미래에게 스며들 듯 밝은 에너지를 심어준다”며 “두 배우가 현장에서도 그걸 너무나 잘해줬다”고 치켜세웠다.
‘미지의 서울’은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지난달 24일 1회에서 3.6%로 시작한 시청률이 한 달 만인 지난 22일 10회 방송에서 7.7%를 기록했다. 케이블 및 종편 채널 동시간대 1위다. 이 드라마의 성공은 타이틀롤을 맡은 박보영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 드라마 출연은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tvN·2021) 이후 4년 만이다. 그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시청률 검색하는 걸 오랜만에 해봤다”면서 “실시간으로 시청자 반응을 살펴보기도 했는데 감사하게도 좋은 평가가 많았다. 미지랑 미래가 구분돼 보인다는 말이 제일 기뻤다”며 미소를 보였다.
‘좋은 메시지’를 지닌 작품에 끌린다는 박보영이 ‘미지의 서울’을 선택한 이유는 역시 메시지였다. 박보영은 “타인의 삶이 나보다 나아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저 사람도 힘들겠구나’ 이해하게 되고, 그런 마음이 결과적으로 나 자신에게도 적용됐으면 좋겠다는 기획 의도가 잘 전달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본을 보면서 크게 위로받은 부분이 있어요. 방에서 나오지 않는 미지에게 할머니가 ‘아무리 모양 빠지고 추접스러워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이요. 누구에게나 후회하는 순간이 있겠지만 그 당시엔 최선의 선택이었을 테니 자책하지 말란 의미겠죠.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게 좋았어요.”
고등학생이던 2006년 드라마 ‘비밀의 교정’(EBS)으로 데뷔한 박보영은 영화 ‘과속스캔들’(2008)로 주목받은 이후 영화 ‘늑대소년’(2012)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tvN·2015) ‘힘쎈여자 도봉순’(JTBC·2017)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넷플릭스·2023) 등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사랑스러운 이미지는 덤이었다. 요정처럼 작은 체구와 귀엽고 선한 얼굴, 애교 섞인 나긋한 목소리는 ‘뽀블리’(박보영+러블리)라는 별명을 탄생시켰다. “한때는 밝은 이미지가 부담스럽기도 했다”는 박보영은 캐릭터 폭을 넓히고자 일부러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을 택한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어느덧 데뷔 20년 차, 3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단다.
“나도 배우인데, 다양한 작품을 하고 싶은데 자꾸 귀엽게만 봐주시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너무 감사해요. 계속 그렇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감사한 일이란 걸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잘 유지하려고요(웃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