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호랑이 맹추격하는 재규어

입력 2025-06-28 00:40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20세기 후반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로 통했다. 일본에 이어 산업화를 이룬 신흥 공업국으로, 제조업과 수출 주도 정책을 앞세워 고도성장을 이뤘다. 가난하고 자원이 부족했지만, 교육과 기술, 무역 개방을 바탕으로 기적을 만들었다.

‘한강의 기적’이란 말을 세계에 알린 한국이 그 중심에 있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반세기 만에 반도체, 조선, 자동차, 디스플레이 등 굴지의 산업을 일으켜 삼성과 현대, LG 같은 글로벌 기업을 배출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최근 반도체 시장만 봐도 분위기가 싸하다. 대만의 TSMC는 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미국은 대만을 ‘전략 자산’으로 여기며 보조금과 안보 협력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갈등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이 새 이름을 꺼냈다. “모두가 아시아 호랑이를 이야기하지만, 미국은 서반구에 재규어 경제를 만들고 싶다.” 크리스토퍼 랜도 국무부 부장관이 미주기구(OAS) 총회에서 한 말이다. 중남미를 아시아처럼 급속 성장시키겠다는 야심 찬 발언이다.

재규어 경제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후 산업화와 수출 주도형 성장을 이룬 멕시코를 지칭하던 말이었다. 속도와 힘, 기민함을 상징하는 중남미의 맹수 재규어를 호랑이에 빗댄 것이다. 그런데 랜도 부장관 발언은 협박에 가깝다. “내가 돈을 대는데 왜 내 말을 안 듣느냐”며 미주기구 탈퇴 의사를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내는 결국 미국식 영향력을 강화해 중남미 경제 주도권을 쥐겠다는 포석으로 보인다.

재규어가 호랑이 굴을 넘보고 있는데 우리는 준비돼 있는가. 한국이 아시아의 호랑이 위상을 잃지 않으려면 단순한 제조업 경쟁력 이상이 필요하다. 기술과 인재는 물론이고, 국제 지정학에 대한 감각, 정책 일관성, 국격에 걸맞은 리더십까지. 이재명정부는 ‘실용’을 꺼내 들었지만 적극적 실행만이 재규어의 맹추격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