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첫 역경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됐다. 나는 1960년 8월 5일 신앙 가문의 1남 5녀 중 둘째로 부산 사하구 감천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회자이자 신학대학 교수였다. 겉보기엔 부족함 없어 보였지만 실상은 역기능 가정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두 분이 두런거리며 이야기 나누는 소리였다. 아버지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결국 고함으로 이어졌다. 나는 손가락이나 베개 이불로 귀를 틀어막으며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여기서 멈추게 해주세요.”
소원하고 또 소원했지만 두 분 다 절대 먼저 사과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대화는 점점 더 험악해졌다. 아버지는 분노조절에 문제를 갖고 있었다. 화가 폭발하면 통제 불능 상태였다. 물건 던지는 소리, 벽을 치는 소리에 이어 방문을 쾅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야 싸움은 끝이 났다.
그런 아침이면 나는 어김없이 아침을 걸러야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퉁퉁 부은 눈으로 입술을 꽉 다물고 옷장을 정리하곤 했다. 어머니의 침묵은 무서웠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보였다. 한으로 짓눌린 굽은 등, 땅이 꺼질 듯 내쉬는 한숨, 거친 손놀림, 서늘한 눈빛. 어머니의 몸은 분노 덩어리였다.
아버지를 향해야 할 어머니의 분노는 자녀들을 향했다. ‘탁’ 서랍 닫는 소리와 동시에 화산이 폭발하듯 화가 분출됐다. 어머니의 화는 언제나 세 치 혀로 옮아 붙었다. 미친 듯이 제멋대로 날뛰는 혀는 지독한 욕설들을 쏟아냈다. 내가 얼마나 못됐고 못나고 모자라고 형편없고 싫은지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이야기했다. 그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꽂혔다. 어린 나는 내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믿었다. 태어남이 저주임을 확신했다.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져 피멍이 맺혔다. 아팠다.
이런 일을 겪을 때면 나는 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은 지옥 같은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어둠 속에서 부모님을 원망하고 증오했다. 복수를 꿈꾸기도 했다. 맞설 수도 피할 수도 없었던 어린아이의 무력감은 나를 깊은 우울의 나락으로 끌어들였다.
마지막 분노의 화살은 하나님을 향했다.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하나님,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부모님을 내가 선택했나요. 싸우지 말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데 왜 한 번도 안 들어주시나요.” 아무리 항변하며 질문을 던져도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대답을 기다리다 지칠 때쯤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향숙아, 네 부모님조차 너를 사랑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할 리가 있겠니. 그러니까 네 말도 안 들어 주시지….”
이후 나는 하나님에 대해 비뚤어진 아이가 되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애벌레처럼 만나는 모든 것마다 장애물이었다. 우울한 얼굴로 불행에 빠져 불행을 전염시키며 살았다.
나는 영원히 이렇게 살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약력△1960년 출생 △고신대·고신대대학원 기독교교육학과 △부산대 대학원 심리학과(EdD) △한예종 무용원 예술전문사 △명지대 대학원 예술심리치료학과 객원교수 △하이패밀리 공동대표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