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밀항자 이름의 정치

입력 2025-06-27 00:34

미국 불법 체류자 단속 지지
여론 적지 않아… 이주민의
절박함 포용할 정치력 절실

세계 내 존재에 붙이는 이름은 뜻이 객관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져야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다. 그러나 널리 사용되는 이름 중에도 타당성이 의심받아 수정을 요청받을 것이 있다. 대표적으로 ‘불법 체류자’라는 말이 그렇다. 이 말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체류비자가 없는 외국인을 강력히 단속하면서 세계의 집중을 받고 있다. 33년 만에 주 방위군이 LA 시위대의 시위에 배치되면서 다수의 미국인뿐만 아니라 계엄군의 잔상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국인에게도 강한 공포를 줬다.

물론 모두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지는 않았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최소한 트럼프의 이민 정책과 관련해 50% 넘는 미국인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우리 포털뉴스에 달린 댓글에도 한국인 상당수가 ‘불법 체류자’에 대한 트럼프 정책에 강력히 동조한다. 이유는 명백하다. 그들은 ‘불법’으로 남의 땅과 일자리, 복지를 훔쳐 사는 범죄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불법 체류자’라는 이름에 문제를 제기하며 ‘법의 테두리를 아직 비켜나 있는 자들’이라는 의미의 ‘미등록 이주자’라는 대안적 이름을 제안한다. 나는 솔직히 새로운 이름이 이주민 추방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 마음을 당장 되돌려 이주민에 대한 관용의 태도로 전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쉽게 낙관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수호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법치주의는 국가의 법이 우선으로 지켜야 할 대상으로 주권을 가진 ‘국민’과 가치가 증명된 ‘선택받은/선량한’ 외국인만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완고한 법치주의의 한계를 성찰하거나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당연히 처벌 대상이 돼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것을 법의 정의라 배워온 것이다.

하지만 ‘미등록 이주자’라는 새로운 이름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때때로 ‘합법’과 ‘불법’의 이분법으로 단순히 판단할 수 없는 절박한 실존적 차원에 직면하게 됨을 알려준다. 단순한 반일주의에 싸여 있던 어린 시절 나는 밀항으로 침략국에 정착한 재일교포 1세대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식민 제국의 정치 군사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에 절대 빈곤의 상황에서 가족 부양을 책임지기 위해 조국을 떠나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굴욕적인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상황을 제대로 헤아려 보지 못한 것이다.

겉으로 봐서는 ‘이주’가 개인의 주제넘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군사력과 경제력에 의해 둘로 나뉜 불평등한 세계가 ‘이주자들’을 강대국으로 끌어모은다. 강대국의 법에 따르면 이들은 ‘불법 체류자’로서 단속 대상이지만, 사실 이들의 유입이야말로 강대국의 경제적 우위를 지속시키는 동력이 된다. 이들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기에 저임금과 위험한 노동 환경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아니, 먹고살며 가족을 이루는 정주 행위 자체만으로도 강대국의 소비시장 밑바닥을 지탱했다. 그래서 그들을 추방하는 일은 강대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요란하게 치러지는 보여주기식 행위일 때가 비일비재하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과 나치 일당에게서 그들이 이 세계에서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음을 꿰뚫어 보았다. 그러나 그 권리 의식이 어떠한 반성 없이 군중에게 확산할 때 결국 그 누군가를 제거하는 국가폭력과 인종 학살이 일어났다. 지상의 모든 곳이 인간답게 살 만한 곳이 되기까지 ‘선택’의 잣대가 되는 법의 테두리를 비켜나는 밀항자들이 안타깝게도 결국 계속 발생할 것이다. 추방의 퍼포먼스로 권력을 지탱하며 세계를 불안에 떨게 하기보다 이주민과의 동거를 위한 참된 정치력과 지혜를 발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리더십을 간절히 바라본다. 법의 정의 너머 법 밖의 정의까지 품어내는 리더십을!

김혜령
이화여대 부교수
호크마교양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