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을 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여권이다. 30여쪽 분량의 작은 책자에 발행 국가와 소지자의 사진을 비롯한 각종 개인 정보가 담겨 있다. 입국 심사대 앞에 서서 여권을 제출하려는 순간에는 까닭 모를 불안감이 밀려온다. 그 불안감은 개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감시와 배제 기능을 하는 '여권의 역설'에서 비롯된다. 미국의 영문학자인 저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여권의 역사와 문화적 의미를 조망하며 역설의 근원을 파헤친다.
여권의 뿌리는 고대 이집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4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마르나 문서’에는 미탄니의 왕이 칙사를 이집트에 보내면서 손에 쥐여준 편지가 포함됐다. “아무도 무슨 이유에서건 그(문서 소지자)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내용이 핵심이다. 저자는 “문서 소지자에게 발급 군주(국가)의 영토를 지나가는 과정에서 안전한 통행을 제공하는 근대 여권의 전조”라고 말한다. 중국의 한나라 때도 ‘전(傳)’으로 불리는 통행증이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전’에는 이름과 출신지, 직위는 물론 신체적 특징까지 소지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 소지자의 이동을 추적하고 통제하려는 의도가 읽히는 대목이다.
중세를 거쳐 근대 이후 여권은 점차 통제와 감시의 역할이 강화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여권은 정치적 망명자나 혁명 세력의 이동을 감시하는 수단이 됐다. 특히 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국경 통제가 강화되던 시기와 맞물려 오늘날 여권의 기본 틀이 만들어진다. 저자는 그 전까지만 해도 신체의 특징을 글로 묘사한 것이 전부였던 데 반해 그 무렵 여권에 사진이 포함됐다는 점을 주목했다. 영국의 경우 베를린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훔친 미국 여권을 이용해 영국으로 건너간 독일의 스파이를 체포한 후 모든 여권 사진에 사진을 의무화했다. 저자는 “사진은 여권을 더욱 강력한 국가 감시와 통제의 도구로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당시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개인의 자유를 규제하는 여권의 등장에 분개했다.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1942년에 나온 회고록 ‘어제의 세계’에서 “지금은 모두를 병적으로 의심하는 까닭에 철조망 장벽으로 바꿔놓고 세관원, 경찰과 민병대를 배치해 둔 국경선도 그 당시에는 그저 상징적인 선에 불과해서, 마치 그리니치 자오선을 지나갈 때처럼 별 생각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고 회상하고 “한때는 범죄자를 떠올렸을 때에만 상상할 수 있었던 굴욕이 이제는 여행 이전과 도중에 여행자에게도 부과된다”고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권 속 사진이 당대 유명인의 문화적 사료 역할을 하기도 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1917년 2월 혁명 이후 공산당 지도자에 대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탈출 계획을 세운다. 이때 필요한 가짜 여권을 만들기 위해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았던 민머리를 가발로 가리고, 특유의 턱수염을 밀고 여권 사진을 찍었다. 변장한 혁명가의 여권 사진은 현존하는 레닌의 턱수염 없는 유일한 사진이라고 한다. 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15년 발급된 영국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여권을 보면 가족사진도 함께 붙어 있다. 조이스의 여권 첫 칸에는 “기혼 여성은 남편이 속한 국가의 국민으로 간주한다”고 규정돼 있다. 당시 여성이 자신의 여권을 갖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고, 특히 기혼 여성은 어떤 경우든 남편 없이 여권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책에는 독일의 나치 시기와 제2차 세계대전의 격변기 동안 여권조차 없었던 무국적 난민과 얽힌 수많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히틀러의 광기에 쫓겨 프랑스에 피신했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나치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시 ‘미국의 쉰들러’라고 불리던 언론인 배리언 프라이는 ‘저명한 유대인’ 구출 작전에 나선다. 유대인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애초 프라이의 구출 명단에는 없었지만 ‘언젠가 유명해질 여자’라는 점이 인정돼 간신히 뉴욕행 여객선에 탈 수 있었다. 아렌트는 미국에 도착한 지 10년 뒤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무국적자는 ‘권리를 가질 권리’조차도 부정당한 존재로 정의한다. 반면 근대 사상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당시에는 ‘유명하지 않았던’ 이유로 프라이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프랑스 출국 비자가 없었던 벤야민은 미국 망명을 위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에 도착하지만 끝내 미국행의 꿈이 무산되자 48세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접고 말았다.
오늘날 여권에는 서열이 존재한다. 국제 법률회사 헨리파트너스와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매년 전 세계 199국의 무비자 협정 체결 현황을 분석해 그 나라 여권의 힘을 가늠할 수 있는 ‘헨리 여권지수’를 발표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좋은’ 여권은 해외여행의 문을 활짝 열어주고 자유로운 이동과 규제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나쁜’ 여권은 소지자를 가둬 버려 더 넓은 세계 대부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국가 공동체의 재소자로 만든다. 저자는 여권은 단순한 이동 허가증이 아니라 그 속에는 ‘국가 권력과 통제’의 속성은 물론 ‘이동권 불평등’이 자리 잡고 있다고 역설한다.
⊙ 세·줄·평★ ★ ★
·여권을 통해 당대 문화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어디에 속하는가’가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시대다
·‘조건부 환대’가 아닌 ‘순수한 환대’의 시대는 요원한가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