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작은 변화

입력 2025-06-27 00:38

지난 3월 미국 세인트폴에 설치된 조그만 나무상자 하나가 조명을 받았다. 전 세계 20만번째로 설치된 책 공유 상자 ‘리틀 프리 라이브러리(Little Free Library·LFL)’였다. LFL은 책을 좋아했던 엄마를 위한 아들의 선물에서 시작됐다. 책 한 권을 나누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받아주는 사람들이 연결되면서 생긴 변화였다.

2009년 미국 위스콘신주 허드슨시에 살던 토드 볼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집 모양의 작은 상자를 만들었다. 그 안에 책을 가득 채운 다음 자신의 집 앞마당 기둥에 올려뒀다.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게 책을 꺼내서 볼 수 있게 했다.

이웃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그는 상자를 몇 개 더 만들어 동네 이웃에게 나눠줬다. 이웃은 주변 이웃에게, 주변 이웃은 또 다른 이웃에게 LFL을 소개했다. 얼마 후 LFL은 세계적인 책읽기운동으로 번졌다. 아동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뉴베리상’을 두 번 수상한 작가 케이트 디카밀로는 “책 한 권이 웃음과 위로, 방향을 줬다”며 이 상자를 “작은 등불”이라고 표현했다.

소박한 마음이 사회적 연결로 확장된 사례는 우리 곁에도 있다.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지방자치단체의 반려식물 보급 사업도 그중 하나다. 누구의 아이디어로 시작됐는지 알 순 없지만 책이 식물로 변했을 뿐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닮아 있다.

화분 하나는 크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매일 아침을 여는 인사이자 오랜 침묵을 깨는 대화의 시작이 됐다. “물을 주기 위해 하루를 시작하게 됐다” “말을 걸 수 있는 존재가 생겼다”는 어르신들의 말은 단순히 복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작은 화분 하나가 웃음과 위로, 삶의 방향을 줬다. 외로움과 단절을 밀어내는 생활의 지지대가 됐다.

세상은 이 같은 일상의 조그만 변화, 작지만 꾸준한 실천들이 모여 발전해 왔다고 믿는다. 사람들의 작은 관심과 배려가 모여 사회의 틈새를 메우고, 우리 모두의 삶을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왔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출판계에 돌풍을 몰고 온 ‘무제’ 이야기가 더 반갑다.

무제는 배우 박정민씨가 대표로 있는 출판사다. 소외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취지로 설립했다고 한다. 최근 무제는 ‘듣는 소설 프로젝트’ 일환으로 김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를 내놨는데, 이 역시 기획 단계부터 독서 접근성이 떨어지는 시각장애인 독자들을 중심에 뒀다.

먼저 오디오북으로 공개됐고, 한 달 뒤 종이책이 나왔다. 종이책이 먼저 나오고, 인기 있으면 오디오북으로 나오던 기존 방식과는 반대되는 행보였다. 관심 있는 책이 있어도 늘 오디오북이 나오길 기다려야 했던 시각장애인에 대한 배려이자 주류 사회에 던지는 일종의 메시지였다.

박 대표는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책이 잘 팔렸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시각장애인들이 가장 먼저 즐긴 책이 아무도 관심 없는 책이 아니길 바라서”라고 했다. 박 대표가 시각장애인들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던 건 단순히 책 한 권이 아니라 베스트셀러 책을 먼저 들었다는 ‘뿌듯함’이었을 것이다. 책은 지금도 잘 팔리고 있고, 오디오북도 덩달아 인기다. 듣는 소설 프로젝트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속도, 숫자, 효율로 매겨지는 세상 속에 이 같은 움직임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복지도, 문화도, 정책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보다 ‘누구에게 어떻게 닿느냐’를 먼저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을까. 거대한 개혁이 아니어도 괜찮다. 이런 일상의 혁신이 많아질수록 더 단단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황인호 사회2부 차장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