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으로서 이토록 화려한 데뷔가 또 있을까. 처음 쓴 각본으로 전 세계 유수의 영화상 각본상을 휩쓸었다. 5년 전 봉준호 감독과 나란히 미국 아카데미 무대에서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 올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영화 ‘기생충’ 각본을 공동 집필한 한진원(40) 감독이 마침내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기생충’ 이후 몇 달간은 참 좋았어요. 글 쓰러 매일 가는 카페에서도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되고…. 전에는 아마 주식 투자하는 사람인 줄 아셨을 거예요(웃음). 처음엔 붕 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싹 빠지더라고요. 아카데미를 수상한 지 5년이 흘렀는데 ‘내 작품’을 내놓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떨리면서도 기분 좋네요.”
연출 데뷔작인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러닝메이트’를 선보인 한 감독을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오늘 잠이 안 오더라”면서 “거장의 울타리를 벗어난 첫 도전인 만큼, 관객의 높은 기대치에 대한 부담이 당연히 크다”고 털어놨다. 다만 “언젠가 털어내야 한다면 ‘척’하지 말고 과감하게 나를 다 드러내 보여주자”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고등학교 배경의 ‘러닝메이트’는 하이틴 정치드라마를 표방한다. 불의의 사건으로 전교생의 놀림감이 된 모범생 노세훈(윤현수)이 학생회장 선거의 부회장 후보로 지명된 뒤 온갖 권모술수를 헤쳐 가는 과정을 그린다. 기호 1번과 2번 캠프 사이에서 현실 정치판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정치공방이 벌어지는데, 그 모습이 흡사 스포츠 경기처럼 박진감 있게 전개된다.
선거라는 소재가 공교롭게도 최근의 정치 상황과 맞물렸다. 한 감독은 “원래 올해 대선이 열릴 시기가 아니었잖나. 선거 시즌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모두가 완전히 평등할 수 없다는 현실을 표현하기에 선거라는 상황 설정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드라마 ‘미생’ 같은 이야기다. 소규모 사회 안에서 일인자의 권력 놀음과 몰락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부연했다.
작품 공개 후 봉 감독은 이런 평을 전했다. “지극히 영악한데 의외로 해맑은 사랑스러운 고교생들의 캐릭터 드라마. 정치와 선거의 한복판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풋풋하고 싱그럽다. 그들 모두의 앙상블을 버무려낸 한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한 감독에게 봉 감독은 ‘산’ 같은 존재이자 스승이다. 그는 “봉 감독님을 그냥 ‘천재’라고 지칭하면 합리적 설명이 사라지는 느낌”이라며 “옆에서 지켜본 감독님은 정공법으로 승부하는 가장 성실한 사람이었다. 작품에 최선을 다하고, 작품을 장악하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고 했다.
한 감독은 “현장에서 봉 감독님을 흉내 내려고 노력했다. 모든 배우와 스태프의 이름을 외우는 건 물론 촬영 중 틈날 때마다 콘티·시나리오 수정을 계속했다”면서 “감독님처럼 작품을 대하고 싶다. 이 태도가 변질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