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때마다 사고 나는데… 맨홀 추락방지시설 8%뿐

입력 2025-06-26 02:18
서울 강남구 한복판에 위치한 맨홀 뚜껑이 빗물에 의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자 뻥 뚫린 구멍 안으로 빗물이 소용돌이 치며 빨려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서초구에 거주하는 문모(28·여)씨는 3년 전 여름을 기억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당시 강남 지역에 홍수가 발생해 문씨의 집 주변은 불어난 물에 완전히 잠겼다. 물이 거의 허리까지 차오르자 문씨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10여명과 손을 잡고 기다란 인간 띠를 만들어 겨우 길을 건넜다.

이후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40~50대 남매가 맨홀 아래로 추락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문씨는 25일 “그때만 생각하면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아찔하다”며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의식적으로 맨홀 주변을 피하게 된다”고 말했다.

장마철마다 맨홀 추락 사고가 반복되고 있지만 추락방지시설 설치율은 8%가 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 말부터 시설 설치가 의무화됐지만 지방자치단체 예산에 의존하는 탓에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이다. 본격적인 장마를 앞두고 정부는 저조한 추락방지시설 설치율을 보완하기 위한 대책 마련을 고심하고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전국 약 353만5000개 맨홀 중 추락방지시설이 설치된 맨홀은 27만2000개로 설치율은 7.7%에 불과했다. 특히 하천변이나 집중강우 중점관리구역(상습 침수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것으로 우려되는 지역)마저 대비가 허술했다. 17개 광역 지자체가 지정한 중점관리구역 맨홀에도 13.6%만 추락방지시설이 설치돼 있다.


2022년 여름 강남역 맨홀 사망 사고 이후 맨홀 추락방지시설 설치를 의무화했지만 최근까지도 맨홀 관련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4일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부산 연제구 연산동에서 맨홀 뚜껑이 열려 길을 걷던 30대 여성이 맨홀 아래로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곳 역시 중점관리 구역임에도 추락방지시설이 없었다.

설치 실적이 저조한 것은 지자체 예산으로 비용을 충당해야 하는 구조 탓이 크다. 기존 맨홀에 추락방지시설을 설치할 경우 지자체 예산으로 설치해야 한다. 재정 자립도가 가장 높은 서울시조차도 중점관리구역 설치율이 36.3%에 불과하다. 환경부는 지자체에 추락방지시설 설치를 독려하고 있지만 지자체의 고유 권한인 탓에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추락방지시설 의무화 고시 이후 표준디자인이나 안전 강도 등 설치에 대한 환경부의 공식 가이드라인도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정부와 지자체는 역대급 장마가 예고되자 보완책 마련에 나섰다. 환경부는 이달 초 시·도 관계자 회의를 개최하고 추락방지시설 설치 외 대안 마련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파악됐다. 환경부 관계자는 “단기간 내 추락방지시설 전체 설치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미설치 맨홀에 대해서는 맨홀 주변 표시, 위험 징후 시 보행 통제 등 대책을 병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