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주술의 시대, 복음을 묻다

입력 2025-06-27 00:31

스물이 다 돼서야 자전거를 배웠다. 페달을 밟기도 전에 중심부터 잡으려 하면 오히려 몸이 굳어져 자꾸 넘어졌다. 진짜 균형은 움직임 속에서만 얻어진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배웠다. 신비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들여다본다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 신비를 직접 통과해야만 균형 잡힌 신앙의 중심도 선다.

C S 루이스는 인생의 신비와 이해의 여정을 자전거 타기에 비유한 적이 있다. 네 단계로 구분된다. 먼저 자전거가 그저 풍경의 일부에 불과하던 유년기의 무지. 다음으로 처음 페달을 밟아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황홀의 시기. 하지만 곧 자전거가 반복의 굴레가 되고 신비가 조롱과 회의 속에 해체되던 시기. 마지막으로 그 삭막한 터널을 지나 다시 페달을 밟을 때, 오래전의 떨림이 되살아나는 회복의 시기(re-enchantment).

이 비유의 맥락에서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쯤일까. 언뜻 신비는 넘쳐난다. 타로, 점집, 굿 유튜브, 기도 체험담이 일상 콘텐츠가 됐고, 공적 결정 과정에 무속적 해석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회적 우려가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진짜 신비의 회복이 아니다. 분별되지 않은 신비, 곧 감각적 주술과 욕망을 신비로 위장하는 마성적 매혹(demonic allure)이 결합한 양상이다. 이 결합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을 신비로 착각하게 만드는, 은밀하고 교묘한 영적 왜곡이다.

우리는 지금 신비를 소비하면서도 성찰은 피하고 있다. 체험은 추앙하면서도 해석은 외면하고 있다. 결국 신비는 진리로 나아가는 문이 아니라 현실을 조종하려는 욕망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루이스가 말한 진정한 ‘재주술화’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회의와 해체를 통과한 신비의 회복이다.

더 두려운 건 이교적 주술이 교회 안에도 은밀히 스며들었다는 사실이다. 복음은 해석되지 않은 채 메아리처럼 울릴 뿐, 성경마저 본뜻에는 무심한 채 각자의 감정에 맞춰 읽히고 있다. 어느덧 성경은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이 아니라 나를 위한 ‘감정의 텍스트’로 전락한 듯하다. 감정은 신앙의 문을 여는 손잡이일 수 있다. 그러나 문을 지난 뒤부터는 진리를 향한 길을 해석과 실존의 언어로 걸어야 한다.

어쩌면 그래서였을까. 신앙은 해석의 언어를 잃고, 반복되는 감정의 언어만 남았다. 애통하는 교회가 아니라 비통한 교회다. 신비를 통과하지 못한 교회, 성찰에 미숙한 교회, 복음을 해석할 언어를 잃고도 자각하지 못하는 교회. 방향을 잃고 미혹의 파도에 떠밀려 표류할 수밖에 없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일갈했다. 말씀이 사라진 자리에는 자기만의 신이 들어선다고. 지금 한국 사회는 그 자리에 주술을 뒀고 교회마저 그 언어에 잠식된 건 아닐까. 그 결과 시대를 해석할 힘을 잃어가는 건 아닐지. 복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교회는 결국 존재 이유도 함께 상실하고 만다. 복음은 침묵이 아니다. 진짜 복음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미신의 귀환이 아니다. 냉소와 해체의 긴 밤을 지나 회복된 신비이자 말씀이 육신이 돼 우리 가운데 거하신 그 사건을 다시 말하게 하는 언어다. 말씀이 온전히 해석되는 자리에서만 비로소 신비를 다시 마주할 수 있다.

주술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다시 말해야 한다. 아니, 다시 살아내야 한다. 땀방울이 핏방울 되기까지, 주님처럼. 주술은 조종하지만 복음은 부르신다. 주술은 효능을 약속하지만 복음은 존재를 요구한다. 주술은 욕망을 자극하지만 복음은 그 욕망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게 한다. 십자가는 언제나 성찰의 언어로 세워지나니! 그 차이를 말하지 못하는 순간 교회는 교회이기를 멈춘다. 그저 오래된 종교 건물일 뿐.

송용원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