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방] 시애틀의 심장을 만나다

입력 2025-06-28 00:30

여행은 걷는 일이다. 신선한 생선과 과일과 별의별 걸 다 파는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을 샅샅이 돌고 난 후 동쪽으로 걸었다.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이 나온다. 여기서 더 걸으면 캐피털 힐에 닿는다. 이방인인 나조차 다운타운과 확연히 다른 지역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건물 벽면마다 그라피티가 어지러웠고,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내건 가게들이 부지기수였다. 여기까지 걸어온 이유는 단 하나, 시애틀 문학의 심장이라 불리는 ‘엘리엇 베이 북 컴퍼니’(엘리엇 베이) 때문이다.

엘리엇 베이 서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의 하루치 에너지는 바닥났다. 다행히 책방은 피곤한 여행자에게 쉴 의자를 내어주는 곳이다. 약 560평 규모의 서점은 층고가 상당히 높았다. 건물을 떠받치는 나무 들보가 그대로 노출됐고, 천장의 채광창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무 질감이 살아 있는 바닥은 삐걱거릴 것만 같았고, 투박하고 불규칙한 나무 서가가 주는 정겨움도 있었다.

엘리엇 베이의 창업자는 월터 카. 1973년 작은 점포로 시작한 책방은 파이오니어 스퀘어의 글로브 빌딩으로 이전하며 영광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아날로그 서점은 어디나 할 것 없이 2000년 초반 이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엘리엇 베이도 예외는 아니어서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2010년에는 파이오니아 스퀘어의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워 이사를 감행했다.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치며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캐피털 힐이 새로운 둥지였다.

엘리엇 베이는 지역의 대표 서점으로,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방문한 곳이다. 그렇다 해도 매력적인 공간 구성과 서점원의 정성이 꾸준히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명성을 유지할 수 없다. 부러 서점을 찾은 여행자는 서점에서 뭔가 기념품이 될 만한 걸 사고 싶어 한다. 이런 독자를 위해 전면부에 티셔츠, 토트백, 다이어리, 펜 등 굿즈가 잔뜩 진열되어 있다.

전면부에서 가장 감동적인 풍경은 추천 도서를 진열해 둔 ㄱ자 서가였다. 직원이 손으로 작성한 추천 이유가 책마다 자랑스레 달려 있었다. 여기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영문판도 만났다. 엘리엇 베이를 찾는 독자를 위해 이곳에 책방의 정신을 응축해 뒀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었다. 독자가 처음 시선이 가는 공간에 베스트셀러나 할인 도서를 두지 않고 직원이 고른 책, 지역 작가의 책을 진열했다. 엘리엇 베이는 마음을 다해 책을 고르고 추천하며, 믿을 수 있고, 살아 움직인다고 말해주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이었다.

엘리엇 베이가 문학의 심장인 이유를 단번에 느낄 수 있는 다채로운 픽션 코너, 일 년에 500회가량 열린다는 작가 행사를 위한 지하 리딩 룸, 커다란 배가 있는 사랑스러운 어린이 코너가 차례로 대기 중이었다. 1979년부터 시작했다는 카페도 서점의 가장 안쪽에서 독자를 맞이했다. 좋은 책방이란 자신이 서 있는 지역과 얼마나 끈끈하게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엘리엇 베이는 온몸으로 보여줬다. 여기까지 걸어오길 잘했다.

한미화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