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트럼프의 약속대련

입력 2025-06-26 00:40

스포츠는 오직 훈련과 집념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기에 각본 없는 드라마로 불린다. 그런데 각본 있는 대표적인 스포츠가 프로레슬링이다. 중년 이상 치고 어릴 적 김일의 박치기, 여건부의 꿀밤 때리기에 환호하지 않은 이는 없다. 1960~70년대 최고 인기 스포츠였다. 하지만 공격과 방어, 심지어 결과까지 미리 짠 ‘약속대련’으로 진행되는 정교한 쇼가 프로레슬링이다.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80년대 들어 하락했지만 미국은 다르다. 미국 최대 프로레슬링 단체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는 이름처럼 약속대련을 오락으로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모두가 쇼임을 알지만 선수들의 개성, 볼거리 가득한 경기 운영으로 연 매출이 2조원에 달한다. WWE 마니아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다. WWE 명예의전당에도 헌액된 그는 WWE 창업자 아내인 린다 맥마흔을 1기 행정부 때 중소기업청장, 2기에선 교육부 장관에 임명했다.

한때 WWE 기획에도 참여했던 트럼프는 약속대련을 링 위가 아닌 전장에서도 발휘했다. 이란이 지난 24일 카타르 알우데이드 미 공군 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하지만 이란은 사전에 미국에 계획을 통보했고 트럼프는 이란에 사의를 표하기까지 했다. 이란 핵시설 공격으로 미국의 힘을 과시한 뒤 확전을 막기 위해 이란의 자존심을 트럼프가 적당히 세워준 것이다. 결과는 이란-이스라엘 휴전으로 이어졌으니 다행이다.

약속대련은 그러나 상대에 대한 신뢰가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화를 부른다. 일본 프로레슬링 대부인 역도산은 54년 일본 유도 스타 출신과의 대결에서 일진일퇴 공방을 벌이다 무승부로 끝나는 약속대련에 합의했다. 그런데 상대가 낭심을 공격하자 화가 난 나머지 실전 타격을 가하며 실신시켜 KO승을 거뒀다. 하물며 경기가 아닌 국가 생존이 걸린 안보 상황에서 약속대련은 위험천만이다. 이란 다음이 북한이라는 풍문이 떠돌아서 하는 얘기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브로맨스만 믿기엔 둘은 너무 예측불가다.

고세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