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2차원적 도형을 말한다. 이 띠는 긴 직사각형의 종이를 한 번 꼬아서 양쪽 끝을 붙여 만들어진다. 뫼비우스의 띠는 바깥쪽과 안쪽이 구분되지 않는다. 눈으로 볼 때는 서로 다른 면처럼 보이지만 뫼비우스 띠의 면은 한 면의 비가향적(non-orientable) 곡면으로 되어 있다. 경계(테두리)가 하나밖에 없는 도형이기 때문에 한 면을 따라가면 출발했던 지점에서 정반대에 도착하며 그렇게 한 바퀴를 더 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뫼비우스의 띠는 무한 반복과 순환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한국 정치는 뫼비우스의 순환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때 그 탄핵과 그때 그 대통령 취임식, 그때 그 기대와 걱정, 그리고 그때 그 기시감 넘치는 여야 정국의 상황들. 또다시 뫼비우스 띠와 같은 역사와 사건이 반복된다면 한국 정치는 뒷걸음질 칠 것이 분명하다.
한국사회도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무한 반복하고 있다. 반세기를 이어오는 대학 서열화와 경쟁 중심의 교육은 2등도 행복하지 않게 만드는 학교를 만들었다. 안보와 대북정책도 정권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가고 경제 외교 사회 문화 등의 정책도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무한 반복의 상황만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정권 앞에서조차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뫼비우스 띠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보았던 반복된 대립과 반목, 진영만 바뀐 식상한 공격과 비판, 바뀌는 정권마다 보이는 정치보복의 모습은 국민의 우려를 낳게 한다. 앞면이 문제가 있어서 뒷면을 선택했는데 돌고 또 돌아 따라가보니 그 뒷면이 곧 앞면인 것과 같은 뫼비우스의 역사가 무한 반복되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서의 역사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지 않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계 22:13)이라고 하셨다. 곧 기독교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뫼비우스와 같은 역사관이 아니라 창조의 시작과 종말의 마지막을 갖고 있다.
기독교인은 오늘 겪은 시간의 경험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단선적인 역사관을 가진다. 오메가의 시간, 곧 미래로부터 역으로 거슬러 현재의 시간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매일 매 순간 소망하며 살아가는 종말론적인 신앙인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믿음의 시간은 결코 과거로 되돌아가지도 못하며 갈 수도 없다. 기독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변화와 소망을 위해 오늘을 맘껏 누리는 종말론적 신앙이다.
따라서 세상에 만연해 있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역사관을 끊어내지 않는 한 기독교의 창조적 진보는 이 땅에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반복은 없다. “과거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현재 지각에 섞일 것”이라고 말했던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의 말대로 어디선가 봤던 역사의 한순간도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는 새로운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세상의 변화에 더 나은 내일을 제안해야 한다. 비판해야 한다면 미래지향적인 지적을 해야 하고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면 뫼비우스의 띠를 잘라내듯 과거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향해야 한다. 교회도 부적의 매듭처럼 묶여있던 내부의 뫼비우스 띠를 잘라야 한다. 똑같은 실수와 반복되는 죄악, 끊임없이 비판받는 교회 내 문제 앞에 “세상이 악(惡)해졌고 예수 믿기 어려운 시대”라는 게으른 변명을 끊어버리고 개혁하고 변해야 한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간으로 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익숙한 반복과 당연한 회귀에 빠지면 더 두려운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안에 교회가 희망이 되고자 한다면 끊어낼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김주용 연동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