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사연 많은 중동 극장

입력 2025-06-26 00:38

언제 깨질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이스라엘과 이란 간 휴전이 이뤄져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영화 이야기를 해본다. 가벼운 대중 영화로 심각한 중동 정세를 논한다는 게 부적절해 보일지 모르나 먼 나라의 복잡한 사정을 알기 쉽게 이해하는 채널로 영화만한 게 없다.

불멸의 클래식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는 영국군 장교 T E 로렌스의 실화를 각색한 작품인데, 미국 이전의 슈퍼파워였던 영국이 현재 중동 지역의 난맥상과 깊은 갈등의 뿌리를 만드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영국은 1차 대전 때 적국이던 오스만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아랍 반란을 지원했다. 이때 활약한 로렌스는 아랍의 독립을 진심으로 원했던 이상주의자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는 아랍 부족들의 끝없는 분열에 실망했고, 그저 아랍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영국 정부는 그를 쓰고 버리다시피 한다.

영국은 전후 아랍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약속(1915년 맥마흔 선언)하면서 프랑스와 아랍 지역을 분할 관리하기로 밀약(1916년 사이크스·피코협정)했고,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도 동의(1917년 밸푸어 선언)했다. 이렇게 상호 모순되는 정책들로 인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 간 갈등의 싹이 튼 것이다.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아르고’(2012)는 미국과 이란 간 갈등의 뿌리를 보여준다. 특히 도입부에서 빠르게 보여주는 배경 설명을 무심코 넘겨버리면 안 된다. 1953년 모하마드 모사데크 이란 총리가 석유산업 국유화를 선언하자 이권을 잃게 된 영국이 미국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크를 축출했다. 권력은 팔레비 국왕에게 넘어갔고 팔레비는 독재와 부패, 급격한 서구화 정책으로 다수 국민의 반발을 샀다.

그 분노가 폭발한 것이 1979년 이란 혁명이었고, 이때 도망친 팔레비를 받아준 미국에 대한 이란인들의 분노도 치솟았다. 여기까지 설명을 보면 그 분노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시 이란 군중이 미국대사관에 쳐들어갔을 때 직원 6명이 몰래 탈출해 캐나다대사관저에 숨었는데,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이들을 기발한 작전으로 구해내는 과정이 ‘아르고’의 스토리다. 대사관 직원들을 사막 배경의 가짜 SF영화 스태프로 위장시켜 빼내온다는 실제 작전도 기상천외하지만, CIA 요원이 TV로 영화 ‘혹성탈출’(1968)을 보다가 작전 아이디어를 얻는 장면이 의미심장했다. 원숭이가 지배하는 혹성은 곧 이란이고, 미국인들이 충격과 공포 속에 그곳을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엔테베 작전’(2018)은 1976년 텔아비브에서 파리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항공기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등에게 납치됐을 때 이스라엘이 폈던 실제 구출작전을 다룬다. 최정예 대테러부대 요원들이 테러범을 모두 사살하고 인질 대부분을 구출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으나 이를 지휘한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은 총을 맞고 숨졌다. 그의 동생 베냐민 네타냐후는 형의 죽음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강해졌고, 국가적 영웅인 형의 후광으로 정계에 진출해 역대 최장 재임 총리가 됐다. 베냐민의 강경 노선은 지금 목도하다시피 가자지구 전쟁, 이란과의 12일 전쟁으로 맹렬하게 이어졌다. 그는 이란과 하마스, 헤즈볼라 등 여러 적을 무찔러 최고의 순간을 맞은 듯하지만 이게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두더지 게임처럼 하나를 때려 눌러도 다른 하나가 분노를 먹고 자라 다시 튀어나올 테니 말이다.

천지우 국제부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