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 : 24 )
유럽 재복음화를 위한 빌리온소울하비스트(BSH) 기도행전팀은 프랑스를 방문하는 동안 16~17세기 프랑스 개신교도였던 위그노들의 순교와 그들의 순교적 삶에 대한 감동적인 스토리에 매료되었다. 17세기 당시 위그노들은 ‘국가 권력이 부여한 종교만을 믿으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그들은 성경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투옥되었고 예배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이들은 끝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나는 단지 신앙의 유일한 표준으로 성경을 읽었고 내 구주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특히 당시 귀부인이었던 그라브롱 부인의 사형 집행자들은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눈물로 애원할 것으로 생각했다. 형 집행 당일,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침착한 태도로 화형대로 나아갔다. 그리고 결혼식에서 입었던 면사포를 쓰고 싶다고 정중하게 부탁해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나의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러 갑니다. 이 면사포는 나의 혼인 예복입니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조차 거룩한 자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며 당당히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위그노는 살아 있다
30여년 전 국제사랑의봉사단 단장으로 선교꿈여행 줄 조이오중창단과 파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파리장로교회에서 말씀 선포와 공연을 하고 당시 담임목사였던 이극범 목사의 안내로 파리 시내를 돌아보던 중 루브르 박물관의 후문에서 이 목사는 이곳이 위그노들이 순교한 현장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를 기념하는 축제의 밤. 로마가톨릭이 주도한 급습 속에 3000명의 위그노들을 비롯해 프랑스 전역에서 3만명이 학살당했다. 그들의 시신은 루브르궁 바로 옆 센강에 던져졌고 강은 피로 물들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그때 살육의 명령이 떨어졌던 왕궁이었다. 에펠탑이 들어선 샹드마르스는 훗날 공공 처형장이었던 장소 인근이며 센강은 지금도 침묵 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세상은 그날을 잊었지만 강은 기억한다고.
지금도 면면히 내려오는 위그노의 유산은 비록 창조적인 소수이지만 세상 속에서 영향력 있는 공동체의 모델,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용기, 복음 진리를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 순교적 신앙이다. 오늘날 파리 거리에선 다시금 프랑스의 다음세대 청년들이 성경을 펼치며 창조적 교회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누군가 지금도 SNS에서 복음 진리를 전하며 조롱을 받고 누군가는 외롭게 카페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친구들에게 변증하고 있다. 누군가 문화적 냉소를 감수하며 예술로 복음을 표현하면서 “우리는 현대의 위그노 예술가”라는 고백으로 미디어 선교를 수행하고 있다.
이 모든 작고 외로운 외침 속에 위그노의 순교 피가 흐르고 있다. 그들은 끝없이 묻고 있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기도하고 있다. “주여, 우리가 복음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침묵의 동조자로 살지 않게 하소서” “순교자의 피로 새겨진 성경 진리가 다시 우리의 가슴을 찌르게 하소서.” 그리고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기 위해 살다
196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권운동가 엘리 비젤은 히틀러가 등장해 유럽을 삼킬 무렵 15살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한순간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겪었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그는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렸고 인간이기를 거부당했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인 그는 저널리스트 소설가 철학자로 활동했다. 그는 1943년 가족들과 함께 체포돼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본인만 살아남았다.
그가 살아남게 된 과정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이곳저곳 수용소에 끌려다니던 비젤은 아버지와 함께 기차의 화물칸에 실려 다른 유대인들과 독일의 부헨발트수용소에 도착했지만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질병 끝에 살아남은 사람은 10명에 불과했다. 겨우 숨이 붙어 있던 그의 아버지도 결국 나치의 손에 의해 화장장에 쳐넣어진다.
비젤은 수용소에서 매일 수천,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건장한 유대인들은 화부로 뽑혀서 동료 유대인들의 시신을 화덕에 넣는 일을 해야 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직접 화덕에 넣어야 했던 아버지도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들이 산 채로 소각로에 던져져 불에 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나이 열여섯이 되던 그해 4월 부헨발트수용소에서 해방을 맞는다. 그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단지 살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 살았다. 엘리 비젤은 “사람이 망각에 복종하면 역사의 부정에 복종하게 된다” “기억은 정의의 기초이며 망각은 다시금 학살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명언과 중첩되는 구절이다.
그의 증언은 더 이상 개인의 트라우마가 아니라 인류가 저지른 죄악을 기억하지 않을 때 다시 반복된다는 진리의 증거였다. 이스라엘 선교여행 중 몇 차례 들렀던 예루살렘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야드바셈(Yad Vashem)의 벽에 새겨진 문장을 생각해 본다. “기억하라,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그리고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 견디게 했는지를.”
한국교회의 순교 역사
지금부터 80년 전 1945년 서울 중앙청 광장엔 일장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펄럭였다. 그날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다. 그동안 빼앗겼던 것은 단지 국권의 상실만이 아니라 신앙과 정신, 언어와 이름, 교회와 예배까지 빼앗긴 시대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3000명의 성도와 교회 지도자들이 투옥당했고, 100명 이상이 순교했으며 500개 이상의 교회가 강제 해산되거나 폐쇄되었다. 주기철 목사는 고문 끝에 “나는 하나님만 섬깁니다”라는 고백을 남기고 옥사했다. 그 시절 누군가는 예배를 고수하다 고문을 당했고 어떤 이는 믿음을 지키다 순교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지금부터 75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서울은 하루 만에 함락되고 낙동강까지 밀린 전선 속에서 민간인 수십만 명이 학살당하고 교회는 해체되었다. 교회 지도자들이 총살당하고 시체는 불태워지고 산 채로 매장당했다. 총칼 앞에서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성도들은 순교자가 되었고 피란지에서는 찬송과 기도로 밤을 지새우며 부흥의 불씨를 지켰다. 이 전쟁으로 당시 한국 인구의 약 20%인 400만의 사상자가 나왔고 성도와 교회 지도자 5000명이 순교를 당했다. 수만 명이 투옥, 고문, 실종됐고 1000개소의 교회가 파괴되었다.
결국 조국을 잃은 눈물과 민족 분단의 처참한 비극, 그리고 여기서 시작된 상한 심령의 기도와 그 시절 뿌렸던 순교의 피가 민족 교회를 살리는 씨앗이 되었다. 어떤 핍박과 고난도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성도를 정결케 하는 불, 복음의 뿌리를 내리는 생수, 부흥을 예비하는 순교의 씨앗이 될 뿐이다. 그 열매로 한국교회는 세계 역사상 가장 급속한 성장과 선교 부흥을 경험했다.
오늘 우리는 그들의 순교의 터 위에 우뚝 서 있다. 우리도 외쳐야 한다. “기억하라. 교회의 순교를, 성도의 기도를, 민족의 눈물을, 그리고 절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프랑스 위그노들의 순교와 엘리 비젤의 증언, 그리고 한국의 순교 역사는 시대와 상황이 달랐지만 동일한 진리를 가리킨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은 단지 추억이 아니라 책임이고 사명이며 다음세대를 위한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