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제 신앙생활은 성공적으로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착한 성도라는 가면 뒤에서 제 영혼이 서서히 소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실패의 뿌리는 제가 정답이라 확신했던 신앙의 첫 질문 속에 있었습니다.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저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진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쁘시게 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 이 미묘한 차이가 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강박은 타인의 박수와 세상의 인정을 받는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으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착한 성도로 살수록 불행해지는 이유’라 제목 붙인 까닭입니다. 저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사람들의 인정’이라는 거짓된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제 신앙은 단 하나의 불협화음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 피아니스트의 연주 같았습니다. 영혼 없는 기교는 저를 서서히 갉아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화려해야 할 무대 위에서 제 손가락이 완전히 길을 잃었습니다. 공들여 쌓아 올린 완벽한 연주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참담한 정적 속에서 하나의 진실이 벼락처럼 제 마음을 관통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완벽한 연주를 감상하는 관객이 아니라 나와 함께 건반을 누르며 춤추고 싶은 아버지셨구나. 나의 심장이 뛰는 순수한 기쁨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싶으셨을 뿐이구나.
그 깨달음은 세상의 박수보다 위대했고 저를 진정 자유롭게 했습니다. 저는 인정이라는 가면을 벗고 진짜 아버지를 만나 새로운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뻐하는 노래가 시작됐습니다. 악보를 넘어 손끝에서 흐르는 순수한 희열과 기쁨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었습니다.
그제야 성경이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라고 선포한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그 기쁨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찬란하게 드러내는 무대라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저를 옭아매던 화려한 새장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인생이라는 피아노 앞에 앉은 당신의 손끝에서는 어떤 음악이 흐르고 있습니까. 세상의 박수를 받기 위해 악보에 갇혀 두드리는 소리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시는 그분 앞에서 자유롭게 부르는 노래입니까. 당신의 연주가 끝나는 날 마지막 악보에 남는 것이 하나님을 향해 쌓아 올린 무거운 의무의 탑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안에서 누렸던 기쁨의 향기이겠습니까.
<약력> △한국기독영화제 대상 △충무로영화제 제작PD상 △시카고한인방송국 저널리스트 △베벌리힐스 영화배급사 소셜미디어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