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이 ‘록구 프라 인디오’(인디언에 미친 사람)이다. 1995년 총회세계선교회(GMS) 파송으로 브라질에 건너간 이미애(61) 선교사는 그곳에서 30년 동안 현지인과 어울려 살고 있다. 브라질 중서부 캄푸그란지가 사역지다. 최근 방한한 그를 대전 동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캄푸그란지는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차로 4시간가량 달려야 나온다. 이 선교사는 그곳에서 ‘베다니 에스콜라’를 운영하고 있다. 캄푸그란지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에 있는 학교는 아이들을 가르쳐 달라는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탁아소로 시작한 뒤 현재의 초등학교로 성장했다. 150여명의 학생이 이 미션스쿨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 선교사는 “브라질 토착민 마을을 돌며 여성을 대상으로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진행했다”며 “당시 아이들이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됐는데 어머니들이 내게 아이들 교육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긴 시간 브라질 선교에 헌신한 이 선교사가 신학교에 다닐 때 첫 선교지로 기도했던 곳은 브라질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감비아로 단기선교를 다녀온 이후 그 나라를 첫사랑처럼 기도하며 준비했다고 했다. 선교사 훈련과 기도 훈련을 받으며 5년이 지났지만 이 선교사를 아프리카로 파송하는 교회도, 불러주는 선교사도 없었다.
그러던 중 이 선교사를 초청한 곳이 브라질이었다. 이 선교사는 “당시 아프리카 선교만 준비했기에 ‘브라질은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정중히 거절했다”며 “그로부터 얼마 뒤 두 번의 초청이 더 왔는데 모두 브라질이었다”고 했다. 그는 “브라질에서만 세 번의 초청을 받고 나니 ‘브라질 선교가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강산이 세 번 바뀔 동안 타지에서 홀로 선교하며 외로울 때도, 재정적 어려움으로 선교지에서 철수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저 그들과 함께 살라”는 선배 목회자의 조언을 기억했다. 이 선교사는 “97년 IMF 구제금융 위기 당시에 선교비가 절반으로 줄면서 철수를 심각하게 고민했다”며 “그때 만난 최영기 미국 서울침례교회 목사님이 ‘현지인들과 그냥 살면 됩니다’라고 조언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이 선교사는 무작정 캄푸그란지의 현지인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지내며 언어를 익히고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이 선교사는 예수님 닮은 삶이 선교의 목표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저는 이룬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성공한 선교가 아니죠. 그렇지만 브라질에서의 선교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 바로 예수님 닮은 삶이었습니다.”
대전=글·사진 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