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도서전에서, 이 피로한 축제에서

입력 2025-06-25 00:34

자신의 책을 직접 팔아보는
소중한 경험… 작은 출판사
소외받지 않게 배려하기를

지난주에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책을 팔았다. 작은 부스에서 손님들을 맞는 일은 힘들었지만 즐거웠다. 원래 책을 만드는 이들은 자신의 책이 팔리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오래전 나는 처음으로 만든 책이 팔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대형 서점에 간 적이 있다. 누군가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하면 설레었고, 다시 자리에 놓아두면 필요 이상으로 번민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가격이 너무 비쌌던 걸까. 뒷표지 문구를 더 맹렬하게 썼어야 하나. 다른 표지 시안을 선택했어야 했을까.

꽤나 궁상맞은 일이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진지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진지하다. 책 한 권 팔면 1만원이 남는다고 하자. 누가 1만원을 주는 것과 책 한 권을 사주는 일 중에서 어떤 게 더 행복할까.

편집자라면 대개 책 한 권을 사서 읽어주는 편이 기쁘다. 이것은 단순히 금전적 이익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원고를 책으로 만드는 과정은 수많은 선택과 노력을 요구하며, 책을 사서 읽어 주는 독자들로 인해 그 노동은 조금쯤 인정받고 위로받는다.

그러므로 도서전은 일종의 축제와도 같다. 손님에게 열심히 자신의 책을 설명하는 동료들을 보며 나는 조금 낯설다는 생각도 했다. 생각해 보면 책 만드는 이들은 아무래도 외향인보다 내향인이 많다.

사실 책은 본래 읽는 이를 혼자가 되게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구텐베르크 혁명 이전에는 글을 아는 이가 귀한 책을 들고 광장이나 교회 같은 곳에서 낭독하면, 글을 모르는 대다수 사람들은 귀 기울여 그 내용을 들었다. 책이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방, 서재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책과 단둘이 마주앉았고, 귀를 통해 들어오던 외부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내면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그러니 책을 좋아해 편집자가 된 이들 중 내향인이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이 오늘만은 ‘어쩌다 외향인’이 되어 목청을 높여 자신의 책을 설명하는 모습은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즐거워 보였던 것은 아니다. 인파로 북적이는 도서전 곳곳에는 지친 동료들이 작고 초라한 부스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화려한 굿즈와 이벤트, 초대형 부스로 무장한 대형 출판사와 책 몇 권으로 고군분투하는 작은 출판사의 도서전은 다르다. 오늘날 출판은 마치 매력 자본의 전쟁터처럼 느껴진다. 출판사는 단순히 책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나 캐릭터가 돼 팬덤을 형성한다. 이를 위해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의 노동은 SNS를 통해 가시화되고 ‘매력적인 콘텐츠’로 재가공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겪는 탈진감이다. 북토크와 SNS, 유튜브는 독자와 더 많이 소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자, 소통하지 않으면 낙오된다는 공포감이기도 하다. 그래서 책 만드는 우리는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착취하며 소진된다. 더 즐겁게 웃으며 말을 건네고 싶지만, 사랑하는 나의 책을 위해 변변한 사은품 하나 마련하지 못한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닷새 동안 그들이 견뎌야 했던 무게감은 작지 않을 것이다.

이 끝없는 압박감 속에서 작은 출판사가 피로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아마 정해진 답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피로한 축제가 누군가의 잘못으로 태어났다기보다 우리 모두의 성실한 노력이 도달한 어떤 중간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질문해볼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주최 측은 얼마나 많은 작은 목소리가 존중받았는지를 측정해 보고, 대형 출판사는 자신들이 그토록 세련되게 구사하는 ‘매력’이 누군가를 배제하지는 않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작은 출판사들은 함께 목소리를 높여 용기를 북돋고, 독자들은 책을 사는 일이 하나의 세계관과 노동을 지켜내는 연대의 행위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이런 질문들이 공허하게 흩어지지 않는다면, 이 거대한 축제의 풍경은 조금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