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중재를 요청하면 청구서가 날아올 게 뻔한데, 뭘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순간 글로벌 ‘호구’가 된다.” 문재인정부 시절 2019년 8월 일본의 수출통제 조치로 한·일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던 때 김현종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미국 중재를 요청하지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중재 없이 일본과 일전을 겨뤄보겠다는, 듣기에는 시원하고 지지층은 열광할 만한 말이었다. 마침 그가 인터뷰한 매체도 문재인정부 강성 지지층이 즐겨듣는 김어준씨 방송이었다. 당시 청와대에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같은 ‘극일’ 열기가 끓어올랐다. 문 대통령은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말을 공개회의에서 했고, 조국 민정수석은 페이스북에 ‘죽창가’를 올리며 반일 정서를 자극했다.
문재인정부는 이런 ‘죽창가 외교’로 미국의 중재 없이 일본과 대결 일변도로 나섰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이 일본 기업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책임을 확정하자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수출규제를 단행했다. 일본의 교활한 도발이었지만 한국은 감정적 대응으로 상황을 악화시켰다. 한국 정부는 2019년 8월 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통보로 맞대응했다. 김 차장은 지소미아 파기를 주도했다. 직접 브리핑에 나와 “국익에 따라 내린 결정”이라며 한·미동맹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겠다고도 했다.
일본을 노린 조치였지만 미국이 먼저 화를 냈다. 한·미·일 협력을 위험에 빠트리는 도박이라는 비판이었다.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한·미동맹이 흔들렸다. 당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정보공유 협정에 대해 한국인들이 내린 결정을 보고 실망했다”고 말했다. 먼저 도발한 쪽이 일본인데, 덤터기는 한국이 썼다. 미국의 노골적 압박에 청와대는 결국 같은 해 11월 지소미아 종료 통보를 ‘유예’했다. 지소미아를 원상복귀시키는 것이 아니라 종료 통보를 ‘효력정지’한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미국의 압박과 국내 여론 사이에서 줄타기했다. 지소미아 파기는 지지층을 반일 정서로 뭉치게 하는 데 특효약이었다. 하지만 경제 문제에 군사·안보 문제를 엮어 미국을 자극한 외교적 무리수였다는 사실이 불과 3개월 만에 확인됐다.
이재명정부의 초기 외교 로드맵은 문재인정부보다는 윤석열정부의 연속선상에 있다. 한·미동맹은 물론 한·미·일 3자 협력도 중시한다. 이 대통령은 지난 17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를 만나 “앞마당을 같이 쓰는 이웃집”이라고 했다. 취임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이후 두 번째로 이시바 총리와 통화하며 “상호 국익 관점”과 “상생”을 강조했다. 2023년 한·미·일 정상의 캠프데이비드 회의를 앞두고 한·일 협력에 대해 비판했던 것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적어도 외교에서만큼은 이재명정부가 이념이 아닌 실용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볼 수 있는 신호다.
국익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외교정책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한국처럼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일수록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외교정책도 유연해야 한다. 때로는 미국에 기울 수도 있고, 때로는 중국 쪽으로 다가가야 할 때도 있다. 동맹파와 자주파가 갈등하며 토론할 수도 있다. 다만 피해야 할 최악의 외교정책은 외교를 지지층 결집에,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는 것이다. 지소미아 파기를 외쳤다가 3개월 만에 슬그머니 효력정지하는 외교야말로 ‘글로벌 호구’가 되는 외교다. 이재명정부가 5년 동안 다른 모든 외교 경로를 모색하더라도 죽창가의 길만은 가지 않았으면 한다.
임성수 워싱턴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