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상처로 괴로울 땐 성장 위한 가지치기의 시간 인내로 성화를 향해 가자

입력 2025-06-25 03:03
게티이미지뱅크

1997년 외환위기는 대한민국의 많은 직장인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금융회사와 기업들의 연쇄 부도로 실직자가 넘쳐나고 가정이 파탄 나기도 했다. 명예퇴직이나 해고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이들은 절망과 배신감에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야근을 밥 먹듯 하며 평생 영혼까지 갈아 넣은 직장에서 밀려날 때의 감정은 한낱 ‘소모품’에 불과했다는 때늦은 자각과 회한뿐이다.

주말도 없이 일했던 A씨. 회사는 경영난을 이유로 맞벌이 부부와 갓 입사한 1년 차 수습직원을 무급휴직으로 내몰았다. 지금 같으면 노동법 위반으로 고소했을 일이지만 구조조정 쓰나미가 몰려온 상황에서 해고를 피한 것만도 다행이라 여기는 분위기였다. 회사에 남게 된 동료나 떠나는 이나 모두가 힘든 시간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했는데, 나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 능력이나 성과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지 운이 나빴던 거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

우리는 살면서 삶으로부터 종종 배신을 당한다. 살아가는 매일매일에 봄날의 햇살만 쨍하게 비치는 건 아니다. 비도 내리고 천둥번개도 친다. 믿었던 친구나 연인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승진에서 차별받기도 하고, 평생 일하던 회사로부터 느닷없는 해고 통지서를 받기도 한다. 절망감과 정신적 황폐함이 삶을 망가뜨리고 켜켜이 쌓인 추억은 상처로 남아 심장을 찌른다. 그러나 죽을 것처럼 힘든 순간이 꼭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고통스러운 순간이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온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일에 파묻혀 소홀했던 것들, 가족이나 건강 등을 되찾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일찌감치 삶의 쓴맛을 본 덕분에 세상을 보는 지혜를 갖게 돼 더 큰 화를 면할 수도 있다.

상처는 면역성이 없다. 다칠 때마다 매번 쓰리고 아프다. 얼마 전 뜻하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사고여서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병원에 다니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흉터가 남지 않을까 걱정했다. 처음 며칠은 약간의 통증이 동반됐고 일주일 동안 통증과 불안함에 잠을 설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고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흉터가 남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하는 느긋함으로 바뀌었다. 극도의 조바심과 걱정이 점차 평온함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살아가는 이치인데 그걸 모르는 우리는 찰나의 순간에 일희일비한다.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시간이 치유해준다. 인생에 폭풍우가 몰아칠 때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순간에도,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 한결 수월할 것이다.

액츠 인터내셔널 창립자인 딕 이네스는 ‘상한 마음을 고치는 법’에서 고통을 이겨내는 법을 제시한다. “자연은 고유의 시간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억지로 밀어붙일 수 없다. 찰과상은 3~4일이면 치유된다. 부러진 뼈가 붙는 데는 6주 정도가 걸린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그 기간을 더 단축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잘 소독하고 무리한 힘을 가하지 않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치유에 필요한 시간을 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치료가 진행되게 한다.…마음의 상처가 치유될 때도 이와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그 과정을 단축시킬 수는 없지만 필요한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자신을 잘 보살피고 치유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치유에 필요한 시간을 주면 된다.”

로마의 제16대 황제이자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상처받았다는 감각을 거부하면 그 상처는 절로 없어진다”고 했다. 그는 또 “설령 상처받았다고 할지라도 분노는 답이 아니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뭘 잘못했는지 보여주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내 말과 행동에만 신경 쓸 때 평온이 찾아온다”고도 했다.

대한천일은행이 1899년 설립된 뒤 114년 만에 우리나라 첫 여성 은행장을 지낸 권선주 전 기업은행장은 언젠가 인터뷰에서 여자라고 차별받았을 때 마음 달랬던 방법을 소개했다. “당신들 손해다. 나같이 회사를 위하고 일 잘하는 직원을 승진 안 시키는 것은 회사가 손해라고 생각하니 편해졌다.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한 번도 실력이 없어서 뒤처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이 먼저 승진하는 게 순리일 수도 있겠다, 내 차례는 다음에 올 것이라고 합리화하면서, 그 대신 기회가 왔을 때 잘할 수 있도록 계속 실력을 키워놔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고비를 넘겼던 것 같다.”

가지치기 과정임을 믿어야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처럼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덜 다칠 수 있도록 마음의 근력을 키워놓자.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는 숨 쉴 수 있는 에어포켓을 만들어놓자. 세상적인 욕망과 매일매일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가면을 벗고 민낯으로 들어앉을 수 있는, 옹벽을 쳐서 절대 나쁜 감정의 찌꺼기들이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곳에서 재충전하고 다시 힘을 얻어서 정글 같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사우스이스트크리스천교회 담임목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카일 아이들먼 목사는 저서 ‘삶이 뜻대로 안 될 때’에서 “고통스러운 일이 다 하나님의 형벌은 아니다. 삶에서 소중히 여기던 것을 잃거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벌 주시기 때문이 아닐 수 있다”며 “하나님이 가지치기를 하시는 것일 수 있다. 하나님은 머릿속에 분명한 그림을 그리고 계시니 그분의 가지치기를 믿어도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질없이 세상에 분노하고 한탄하는 것은 영혼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다. 그보다는 세상의 이목이나 좌절감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정과 일상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 삶에서 버려야 할 죽은 가지, 주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해로운 관계,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가지치기 과정임을 믿으라는 것이다.

인생을 한 발 떨어져 줌아웃해서 보면 고난은 긴 인생에 만나는 아주 작은 돌부리일 뿐이다. 미국 바이올라대와 탈봇신학교 교수로 40년 동안 상담과 심리학을 가르치고 결혼·가정·아동 분야 전문치료사인 H 노먼 라이트 박사는 ‘상처를 마주하는 용기’에서 상처 치유법을 소개한다. 과거의 상처에 대해 ‘왜’라고 곱씹지 말고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 접근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슬픔은 억지로 밀어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빨리감기 버튼도 없다.…자신의 삶을 안정시키려면 더 이상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앞으로 필연적인 삶의 변화를 겪게 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자신의 느낌과 상관없이 충만한 삶이 앞에 놓여 있으며 그것은 목적과 의미가 가득한 삶이라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 속 상처와 배신

구약성경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해 낙심해 있었다. 남편 엘가나는 한나 외에 브닌나라는 부인이 한 명 더 있었고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다. 한나는 아이를 낳고 싶었으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브닌나는 시기와 질투심으로 남편의 사랑을 더 받는 한나를 괴롭혔고 한나는 울고 먹지 못했다. 그는 마음이 괴로워 하나님께 통곡하며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기도했다.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아들 사무엘을 낳게 하셨다. 한나의 낙심과 상처는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우리의 방법이 통하지 않아 낙심되고 상처를 입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매달려 마음을 쏟아내는 것이다. 한나의 기도가 이를 보여준다.

욥과 예레미야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다. 우울증에 걸린 엘리야는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 달라고 기도했다. 예수만큼 큰 배신의 감정을 겪은 이가 있을까.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고 제자 가룟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를 적들의 손에 넘겼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절규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인류를 구원하려는 더 큰 뜻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