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나는 진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은 마음속 다짐이나 순간의 감정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실은 오랜 시간 인내하며 지켜낸 순종으로 나타난다. 인내가 없으면 진실도 없다.
아합 왕가의 우상숭배를 심판하는 칼바람이 북이스라엘을 휩쓸던 시절, 누구보다 그 현실을 애통해했던 사람이 있었다.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으로만 분노하고 슬퍼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야가 쫓겨 도망할 때, 엘리사가 전국을 돌며 수고할 때, 선지자들이 순교할 때,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사마리아에 있는 자기 집에 가만히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사의 심판을 집행하던 예후가 그에게 다가와 묻는다. “네 마음도 진실하냐.”(왕하 10:15) 이 질문은 정치적 연대를 위한 제스처였을 수 있다. 하지만 여호나답에게는 자신의 안일한 신앙을 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을 것이다. ‘나는 정말 진실한가.’ 이 질문 앞에서 그는 그동안 마음만 앞섰을 뿐 여전히 죄악의 중심지 사마리아에 안주하던 자신의 모습을 봤다.
마음과 삶의 불일치를 직면한 그의 회개는 처절했다. 이 깨달음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그는 예후와 잠시 손을 잡았지만 예후의 열심이 하나님보다 자신의 성공을 향한 것임을 분별하고 길을 달리했다. 그러곤 자신은 물론 후손들이 세속의 가치에 섞이지 않도록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집도 짓지 말며 땅에 정착하지 말라”는 가문의 원칙을 세웠다.(렘 35:6~7) 한 사람의 처절한 회개가 200년을 이어지는 가문의 신념이 된 것이다.
그 결단은 200년의 세월을 이겼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은 그의 후손들을 시험하신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포도주를 권하게 하셨지만 그들은 단호히 거절했다. 여호나답의 가훈을 지켰다. 이에 하나님은 고지식해 보이는 단순한 순종을, 당신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듣지 않는 유다 백성을 향한 책망의 증거로 삼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하셨다.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렘 35:19)
이 오래된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최근 한 청년도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이 질문 앞에 섰다. 그는 스스로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원하는 회사의 면접관이 던진 질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술은 좀 하십니까. 기독교인도 포도주는 마시지 않나요.”
합격하고 싶은 욕심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며 머릿속으로 수많은 계산을 했다. 타협의 이익과 신념을 지키는 것 사이에서 손익을 저울질했다. 바로 그 순간 “네 마음도 진실하냐”는 말씀이 생각났다. 그는 간신히 자신의 원칙을 고백했다. 이로 인해 면접장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고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원칙대로 살려는 것 때문에 소중한 기회를 잃었다’는 억울함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실패는 끝이 아니었다. 그는 말씀을 묵상하던 중 레갑 자손의 이야기를 다시 마주했다. 그리고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위로 속에서 자신의 진실함이 얼마나 얕고 이기적이었는지 깨닫고 회개했다. 그는 곧 이어진 다른 회사 면접에서 자신의 소신을 더 당당하게 밝혔고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실패의 고난이 오히려 그의 신앙 인격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새로운 기회를 연 것이다.
진실은 말이 아닌 삶으로 지켜내는 것이다. 믿음은 감정이 아닌 결단이고 회개는 눈물이 아닌 돌이킴이다. 유다 백성은 수많은 선지자의 외침을 외면했지만 레갑 자손은 수백 년 전 선조의 유언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한 사람의 진실한 결단이 대를 이어 가문의 정체성이 되고 역사를 바꾸는 힘이 됐다.
우리 역시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날마다 수많은 선택을 마주한다. 직장에서의 이익, 관계에서의 자존심, 세상의 압력 앞에서 나의 진실은 안녕한가. 진정한 용기는 ‘나는 옳다’고 주장하는 데 있지 않고 ‘내가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며 더 높은 가치에 순종하는 데 있다. “네 마음도 진실하냐.” 오늘 이 질문에 진실한 순종으로 답하는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들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