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검은봉투법

입력 2025-06-24 00:40

출판기념회는 저자와 독자가 만나 혼신을 쏟아 만든 저작의 의미를 나누는 문화의 장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정치판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진짜’ 작가들은 출판기념회 대신 조용히 북 토크로 우회해야 했다.

지금 어느 정치인이 출판기념회를 한다고 하면 대필작가가 써준 책의 내용은 뒷전이고 후원금, 참석자 명단 등 세 과시의 여부가 먼저 떠오른다. 선거철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출판기념회는 떴다방처럼 사라진다.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고전적 ‘탈법 모금 창구’다. 연간 한도가 1억5000만원인 정치후원금은 선거관리위원회에 내역을 신고해야 하지만,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경조사로 분류돼 전혀 규제를 받지 않는다. 현행법상 선거일 전 90일부터 출판기념회를 개최할 수 없다는 규정만 있을 뿐이다. 향후 개발권이나 사업권을 염두에 두고 전달되는 뇌물일지라도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카드 단말기를 버젓이 의원실에 갖다 놓고 피감기관을 상대로 강매하다시피 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누가 사서 누구에게 건넸는지, 책은 몇 권이나 유통됐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당시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출판기념회 서적 판매 시 카드결제 의무화와 투명 공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당시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결국 무산됐다. 그땐 여당이었던 국민의힘이 이번엔 야당이 되어 책 발간 수익을 정치자금으로 관리토록 하는 ‘검은봉투법’을 들고 나왔다. 주진우 의원은 인사청문회를 앞둔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의 출판기념회 의혹을 계기로 법안을 발의했다. 정가 초과 금지, 수익 공개, 카드결제 의무화 등이 핵심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정치권에 ‘출판기념회 공생 구조’가 굳건한 상황에서, 야당 국민의힘의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진짜 책이 조용히 물러난 자리를 돈 봉투가 채운 현실을 이제라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동훈 논설위원